[영광의 얼굴01] 20세기 최고의 축구선수, 펠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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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축구 팬들의 가슴 속에 “축구 황제”로 살아있는 이름 펠레, ‘에드손 아란테스 도 나시멘토(Edson Arantes do Nascimento)” 는 1940년 10월21일, 브라질의 작은 시골 마을 트레스 코아코레스(Tres Coracoes)에서 축구 선수 출신이었던 돈 디뇨(Dondinho)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체계적인 지도를 받으며 축구를 익힌 펠레 소년은 타고난 소질을 바탕으로 일취월장했다. 15세까지 바우루 클럽 소년 축구팀에서 뛴 그는 이 때부터 이미 특출한 기량을 나타냈고, ‘펠레’ 라는 별명이 따라붙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

1956년, 만 16세가 되기 전에 펠레는 브라질 최고의 명문 팀인 ‘산토스(Santos)’에 입단, 프로 선수가 되었다. 이듬 해에 국가 대표에 뽑힌 그는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출전, 세계 무대에 첫 선을 보였다.

‘58년 제 6회 스웨덴 월드컵. 17세의 나이로 처녀 출전한 펠레는 프랑스와의 준결승에서 헤트트릭을 기록하며 세계인들을 경악하게 했다. 이어진 주최국 스웨덴과의 결승전에서 펠레는 이제까지 누구도 볼 수 없었던 환상적인 축구 묘기를 선보이며 조국 브라질에 감격적인 월드컵 첫 우승을 안겼다.

소년 펠레의 출현은 세계 축구에서 브라질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였다. ’62 년 칠레에서 벌어진 7회 월드컵에서도 브라질은 승승장구, 결승에서 체코를 누르고 2연패를 달성했다.

’64 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펠레는 25세의 나이로 절정의 기량을 뽐낼 준비가 되어있었고 브라질의 월드컵 3연패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예선 1차전 불가리아와의 경기에서 펠레는 불의의 부상을 입고 남은 경기에 출전할 수 없게 되었다. 남은 모든 경기에 출전할 수 없게 된 이후 브라질은 연패, 예선 탈락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돌아서야만 했다.

1970년 제 9회 멕시코 월드컵, 통산 4번째 월드컵에 출전한 펠레는 조국 브라질에 줄리메컵을 선물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월드컵 3회 우승국에 영구히 주어지는 우승컵을 조국에 안겨줄 기회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브라질 외에도 우루과이와 이탈리아가 줄리메컵을 노리고 있었고 잉글랜드와 체코, 페루등 강 팀들이 대거 출전, 브라질의 목표 달성은 쉽지않아 보였다.

그러나 펠레의 화려한 득점 행진에 힘입은 브라질은 잉글랜드, 체코, 페루를 줄줄이 꺾고 결승에 진출, 줄리메컵을 놓고 격돌한 이탈리아를 누르고 월드컵 트로피의 첫 주인이 되었다.

펠레는 전 생애를 통해 1362게임에 출전해 1280골을 넣었고, 국제 대회에서 7회을 포함해 92회의 헤트 트릭을 기록했다. 최다 게임 출장 기록과 최다 헤트 트릭 수립 기록은 아직아무도 깨지 못하고 있다.

은퇴 이후 그는 지도자 생활을 하지 않았다. 영원한 스타로 우리에게 기억되기 위해서였을지 모른다.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 후 사업에 전념하던 펠레는 체육부 장관으로 입각, 체육정책을 입안하는 자리에서 조국 브라질에 봉사하며 전 세계의 팬들에게 영원한 스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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