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깊이 읽기] '옛글의 여운' 지금 봐도 새롭네

중앙일보

입력 2005.03.18 17:10

업데이트 2005.03.19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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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선비의 소리를 엿듣다

정병헌 외 엮음, 사군자, 720쪽, 3만4000원

"왜놈들은 자기들이 조금 강한 것을 믿고 의기가 양양하여 이웃 나라를 위협해서 원망 사는 것을 능사로 삼고 맹약을 파기함을 장기로 여겨 국교하는 대의도 생각하지 않고 각국의 공론도 돌아보지 않고 오직 남의 나라를 빼앗으려는 욕심만 부려 거리낌이 없으니…이같은 자를 어찌 버려 두고 죽이지 않겠습니까?"


외교권을 빼앗아간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을사오적'을 처벌할 것을 간한 면암 최익현의 글 중 일부다. 결국 그는 항일 의병을 일으켜 투쟁하다 대마도로 잡혀가 객사했다. 뜨거운 애국충정과 항일 의기가 독도 문제로 나라가 시끄러운 오늘날 더욱 새롭게 다가온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어디 있으랴'란 말을 믿는다면 우리의 생각, 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치의 시시비비를 가리거나 세상살이, 경치를 그린 아름다운 글이 요즘도 많지만 우리 조상의 글과 생각에 빚진 것이 적지 않을 것이다. 문학인이며 정치가이자, 철학자. 경륜가이기도 했던 수많은 선비. 대덕들이 얼마나 깊이 세상의 이치를 궁리하고 바른 삶을 모색한 결과를 남겼겠는가.

이 책은 그 많은 글 중 멀리는 신라 경덕왕 때의 학자 설총에서 구한말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까지 84명의 글 149편을 가려 뽑아 현대문으로 옮긴 것이다. 이규보, 이색, 이 이, 이황, 정약용, 김정희 등 익숙한 이름도 보이지만 홍우원, 장현광 등 낯선 이의 글도 담겨 반갑다. 소설 '죽부인전'을 남긴 고려 후기 학자 이곡의 '차마설'(借馬說)도 그 중 하나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어느 것이나 빌지 않은 것이 없다. 임금은 백성으로부터 힘을 빌어서 높고 부귀한 자리를 가졌고 신하는 임금으로부터 권세를 빌어 은총과 귀함을 누린다…그 빈 바가 또한 깊고 많아서 대개는 자기 소유로 하고 끝내 반성할 줄 모르고 있으니 어찌 미혹한 일이 아니겠는가"

삶에 대한 깊은 성찰도 그렇고, 수 백년 전에 어떻게 이런 민주적 생각을 했는지 새삼 감탄이 나온다. 옛글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명력을 지니며 우리가 때때로 읽고 생각해 볼 가치가 충분함을 보여준다.

이전에 조선시대 과거시험의 명답이나 명상소문을 엮은 '책문'(소나무), '상소'(세시)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 책은 정치, 삶의 예지, 자연, 노래와 글, 여행, 역사와 전통, 사랑과 우정 7가지 주제별로 묶어 다양한 글을 취향 따라 맛볼수 있다. 한 가지 귀띔하자면 이미 문고본으로 나온 7종을 다듬어 묶은 것이어서 조금만 품을 들이면 좋아하는 분야의 글만 찾아 읽을 수도 있다.

김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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