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호 회장, 어디서 뭐 하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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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호 02면

한진중공업은 1937년 부산 영도에 세워진 조선중공업(45년 대한조선공사로 상호 변경)이 모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조선소다. 조선 강국을 일군 주역이자 조선업 인재의 산실이었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고질적인 노사분규로 어려움을 겪었다. 2003년에는 115일간 파업을 했고, 이 과정에서 크레인 농성을 하던 노조위원장이 자살하는 비극이 있었다.

그러는 사이 경쟁업체에 뒤처졌다. 대우조선해양과 현대중공업은 올해 각각 21년, 17년 연속 무분규로 임금협상을 타결했다. 두 회사도 한때는 파업과 직장폐쇄가 반복되는 문제 사업장이었다. 두 곳이 환골탈태한 것은 회사가 문을 닫으면 노조도, 경영진도 공멸한다는 위기감에서 비롯됐다. 노조가 달라졌고, 회사 측도 진심으로 노조를 대하면서 신뢰가 쌓였다. 그 차이가 지금 한진과 대우·현대의 극명하게 다른 처지로 나타난 것이다.

이번 한진중공업 사태가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몰고온 데는 평소 신뢰를 쌓지 못한 노사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정리해고자 처우 문제는 노사가 6월 27일 22개월분의 월급을 위로금으로 주기로 합의해 일단락된 상태다. 따라서 농성을 계속할 명분은 없다. 하지만 그런 정당성 논란과는 별개로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의 처신은 극히 유감이다. 조 회장은 국회가 그를 청문회 증인으로 채택한 직후인 6월 17일 출국했고 현재 행방이 묘연하다. 자기 회사 때문에 나라 전체가 들썩이고 있는데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것이 1400여 명이나 되는 직원과 그들의 가족, 협력업체 종사자 1500여 명의 생존을 책임진 대기업 오너 겸 최고경영자(CEO)의 처신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조 회장이 진작 전면에 나서 노조를 설득하고, 경영 정상화에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면 상황도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사자인 조 회장이 해외를 빙빙 도는 동안 외부세력이 파고들어 한진중공업 사태는 정치게임으로 변질돼 버렸다. 희망버스를 제2의 촛불시위로 몰고 가려는 세력도 문제지만 그걸 방치한 조 회장의 책임도 결코 가볍지 않다.

우리 사회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양극화는 갈수록 심해지고 부자들과 대기업을 흘겨보는 시각도 늘어나고 있다. 사회의 갈등과 앙금을 풀어내려면 가진 계층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성심성의껏 실천해도 모자랄 판이다. 조 회장 같은 무책임한 태도는 가진 계층 전체에 대한 불신감과 적대감을 증폭시킨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조 회장은 하루빨리 귀국해 사태 수습에 나서야 한다. 국가가 알아서 해결해 달라고 나 몰라라 하는 태도는 안 된다. 그런 뒤 국회 청문회에도 참석해 해명할 게 있다면 해명하고, 잘못이 있었다면 책임지는 당당함을 보여라.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다. 조 회장에게는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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