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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도청과 ‘공공의 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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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마동훈
고려대 교수·미디어학부

해리는 의뢰인의 아내와 그녀의 애인이 공원과 길가에서 주고받은 조각 대화 내용을 첨단 도청 기술과 탁월한 경험을 이용해 조합, 복원해 낸다. 그러던 중 도청 때문에 이들의 목숨이 위험에 처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어 큰 충격에 빠지게 된다. 한편 자신도 누구인가에게 도청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 그러나 최고의 도청전문가 해리도 자신의 집에서 도청의 증거를 발견해 내지는 못한다. 이야기의 말미에서 해리는 일과 양심의 사이에서 갈등하며 회한(悔恨)의 눈물을 흘린다. 오래전 본 미국 영화감독 프랜시스 코폴라의 범죄 스릴러 ‘컨버세이션’(The Conversation, 1974)의 이야기다. 진 해크먼이 주인공 해리의 분노와 좌절을 매우 애절하게 연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영국 의회 청문회장에서 루퍼트 머독이 눈물을 흘렸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내 인생에서 가장 부끄러운 날’이라고 말했다고는 한다. 만약 머독이 눈물을 보였더라도 그 눈물의 성분이 영화 속 해리의 눈물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법 도청을 직업으로 수행해야 하는 한 개인의 불안과 고통, 그리고 양심의 목소리로 적셔진 해리의 눈물이 머독의 눈가에서 보이지는 않는 것 같다.

 미국이 당대의 ‘악(惡)의 축(軸)’으로 간주됐던 독일과 일본을 상대로 한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미군과 정보당국의 선진 통신 감청 기술과 암호 해독 능력이었음은 사실이다. 미국과 자유 진영에서 동의한 ‘공공의 선’ 논리가 미군의 통신 도청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1974년 미국 정계를 뒤흔든 ‘워터게이트 사건’을 기억해 보자. 당시 닉슨 행정부는 베트남전쟁 반대를 정쟁의 중심으로 몰아가는 민주당 선거운동 본부가 자리 잡은 워터게이트 호텔을 불법 도청했다. 닉슨은 미국의 국익을 위해 한 일이라는 변명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미국 국민은 불법 도청 자체가 미국 사회의 공공의 선에 결정적인 위해(危害)를 가했다고 봤기 때문이다. 불법 도청이라는 비정상적 정보 수집 수단이 갖고 있는 치명적인 도덕적 결함 때문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간파한 닉슨은 정면 돌파 대신 책임 회피의 위기관리 전략을 택했다. 그러나 결과는 대통령 탄핵과 하야로 이어졌다. 이것이 바로 국민이 생각한 공공의 선이었다.

 영국의 뉴스 오브 더 월드의 기자들이 정치인의 개인 휴대전화를 상습적으로 불법 도청해 오다가 발각된 최근 사건의 파장은 매우 컸다. 세계 제2위 규모의 메가 미디어 그룹을 이끌어 온 머독이 두 손을 다 들었다. 불법 도청의 이유가 정치인의 사생활 엿보기를 즐기는 독자들의 눈을 끌기 위한 상업적 선정주의일 수도 있다. 정치권의 권력투쟁 과정 내부에서 언론도 자신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한 건(件)’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 혹은 국익을 위해 정치인들의 비밀스러운 대화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었다고 변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궁색한 이야기다. 수단의 비윤리성으로 인해 이미 모든 목적의 정당성이 설 땅을 잃었기 때문이다.

 정당과 정치인은 더 나은 정책을 실현시킴으로써 경쟁한다. 기업과 기업인은 더 나은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며 시장에서 경쟁한다. 언론과 기자는 독자의 ‘알 권리’의 시장에서 경쟁한다. 소위 언론의 ‘특종(特種)’ 경쟁이 그것이다. 그러나 모든 경쟁에는 정당한 방법과 수단만이 쓰여야 한다. 축구 경기 중 공에 손을 대거나 복싱 링에서 상대 선수의 뒤통수를 가격하면 레드카드를 받는다. 기자에게 불법 도청은 레드카드 대상이다. 명분과 이유가 무엇이든 개인의 은밀한 이야기를 불법적으로 엿듣고 이를 정치적, 혹은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행위는 사회적 포용의 범위를 넘기 때문이다. 직업인이기에 앞서 한 개인이 지켜야 할 사회적 윤리의 최저 기준점을 넘었기 때문이다.

 벤담 식의 공리주의 정의론과 자유주의 정의론에 한계가 있으며, 따라서 ‘공공의 선’ 관점에서의 정의론을 주장하는 마이클 샌델 교수의 이야기에 공감한다. 여기에 절차와 과정에서의 올바름과 정당함이 덧붙여져야 한다. 우리 언론도 공공의 선을 추구하기 위해 정당한 절차의 원칙을 준수하며 취재하고 보도해야 한다는 기본(基本)을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한다. 해리의 무력감과 죄책감으로 범벅된 눈물이 우리 현실에서 재현돼서는 안 된다. 머독의 긴 한숨 소리도 우리 현실에서 재현되지 말아야 한다.

마동훈 고려대 교수·미디어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