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청소년 롤모델에게서 듣는 진로 조언 - 파주 출판도시 총감독한 건축가 승효상씨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2면

“건물에서 감동을 느꼈다면 건축자재나 구조 때문이 아니라 공간의 어떤 흐름 때문”이라며 “그 공간에 사는 이의 ‘삶의 흐름’을 설계하는 것이 바로 건축 설계”라는 건축가 승효상씨. [황정옥 기자]

파주 출판도시 건설의 주역, 건축가 승효상씨가 건축가를 꿈꾸는 이상우(인천 계양고 3)·이승철(서울 오산고 2)군의 1일 멘토로 나섰다. 6일 그의 건축연구소 ‘이로재(서울 동숭동)’에 들어선 상우군이 내부를 둘러보며 “페인트칠을 하지 않아 콘크리트 블록을 쌓아 올린 벽면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게 인상적”이라고 입을 뗐다. 승씨가 “페인트를 칠하면 재료가 돌인지 나무인지, 혹은 좋지 않은 재료인지 알 수 없다”며 “자재의 성질과 건물 구조가 솔직히 드러나는 정직한 건축을 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이렇게 멘토링은 시작됐다.

글=설승은 기자
사진=황정옥 기자

승효상씨의 1일 멘티 이상우(왼쪽)·이승철군.

▶상우=미술에 소질이 없어 걱정된다.

▶승효상(이하 승)=미술 실력이 도움은 되겠지만 오히려 방해되는 경우도 많다. 내가 만화를 그리면 전교생이 다 돌려볼 정도로 그림을 잘 그렸다. 하지만 사람의 삶을 디자인하는 것은 손이 아닌 마음이라는 걸 한참 후에 깨달았다. 타인이 사는 방법을 충분히 고민하지 않고 손재주에 만족해하면 스스로를 기만하기 쉽다. 건축용 드로잉은 화려할 필요가 없고 단선으로 공간을 아주 명확히 표현할 수 있으면 된다.

▶승철=건축가에게 필요한 자질을 몇 가지 꼽아 달라.

▶승=첫째는 관찰력이다. 건축가는 남이 사는 집을 설계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의 삶을 연구하며 그들의 입장을 생각해야 한다. 관찰한 내용을 분석하고 조직하려면 논리력도 필요하다. 이 집을 어떻게 지을까, 마음껏 상상력을 펼칠 줄 알아야 하며 남과 다른 건물을 지을 수 있는 창의력도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문학·역사·철학 공부가 필요하다.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잘 알아야 다른 사람이 사는 공간을 설계할 수 있다.

▶승철=건축가로서 어떨 때 힘든가.

▶승=건축주와 의견이 충돌할 때다. 건축주는 당연히 개인의 이익을 추구한다. 하지만 건축가의 직무는 건축주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건축주가 원하는 건물이 이웃의 일조권을 뺏거나 길을 막는 등 공공의 이익을 해치면 “이 집은 당신의 집이 아니다. 당신은 이 집을 사용할 권리가 있지 소유권은 사회에 있다”며 건축주를 설득한다. 싸우기도 한다. 건축주가 원하는 대로 하면 편하겠지만 갈등의 순간에도 건축가로서 신념을 지켜내야 한다. 당장은 일을 잃겠지만 그 건축주들이 정말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일을 의뢰해 온다.

▶상우=설계하다 막히면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는지.

▶승=땅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터에는 그 땅에 살아온 사람들이 아로새겨온 고유한 무늬, ‘터문’이 있다. 이 터문을 밝혀내고 거기에 무늬를 하나 덧대는 일이 바로 건축설계다. “난 이런 무늬가 더 필요하다”는 땅의 요구를 잘 들으면 설계는 저절로 된다. 나는 고(古)지도와 땅에 관한 기록을 찾고, 동네 노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땅이 어떻게 변해왔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땅에 얽힌 역사를 더듬어 땅을 이해했을 때 비로소 “이렇게 설계해 달라”고 땅이 말을 건다.

▶상우=수많은 작품들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승=마산성당을 잊을 수 없다. 스승님이었던 김수근 선생님 휘하에 들어가 첫번째로 한 작업이었다. 성당 준공 후 피곤한 얼굴로 성당에 들어가던 한 여공을 봤다. 그런데 성당을 나설 때 여공의 얼굴에는 편안함이 가득했다. 공간이 한 사람의 마음을 평화롭게 바꿔놓은 것이다. 건축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몸소 느꼈던 순간이다.

▶승철=스승이 한국 현대건축의 거장 김수근씨다. 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겠다.

▶승=맞다. 영원한 내 멘토다. 12년간 선생님 문하에서 일하며 많이 배웠다. 1986년에 돌아가시고 나서도 선생님의 사무실을 이어받아 3년을 이끌었으니 15년 동안 ‘김수근 건축’만을 한 셈이다. 내 길을 갈 차례였지만 ‘승효상 건축’은 무엇인지 고민의 늪에 빠졌다. 선생님과 내가 무엇이 다른지 3년 장고한 끝에 92년 내 건축의 화두로 선언한 게 ‘빈자의 미학’이다. 선생님에게서 벗어나려는 노력 속에 진짜 ‘내 건축’을 찾을 수 있었다.

▶승철=‘빈자의 미학’이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가.

▶승=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건축이라기보다 ‘가난할 줄 아는’ 사람들을 위한 건축을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방법을 부자들이 배울 수 있다면 좋겠다. 바로 공동체적 삶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소유한 건 적지만 타인과 많은 부분을 공유한다. 나는 달동네에서 자랐다. 피난민촌에서 마당 하나를 두고 8가구가 살았다. 화장실도 하나, 우물도 하나뿐이라 아침마다 난리였다. 부대끼니까 싸우기도 하지만 서로 나누고, 위해주고 무슨 일 있으면 같이 떡도 해먹는 그런 공동체적 삶을 요즘엔 찾기 힘들다. 공동체가 회복되면 이 사회가 바로 설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상우=한 마디 더 조언한다면.

▶승=‘신처럼 창조하고 왕처럼 명령하고 노예처럼 일하라.’ 현대조각의 선구자 브랑쿠시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에 시달리다 미술에 대한 꿈을 좇아 고향 루마니아를 떠나 파리로 간다. 천신만고 끝에 파리에 도착한 그는 이 글귀를 방 벽에 써 붙인다. 재능과 창의력을 번뜩이게 갈고 닦으며, 권위와 자존감을 갖고 성실한 자세로 끊임없이 노력하겠다는 의미다. 훗날 브랑쿠시는 조각가로 이름을 날렸다. 이 글귀처럼 한다면 어떤 분야에서든 틀림없이 성공할 수 있다.

건축가 승효상씨는

1952년 부산 출생. 서울대 건축학과와 동 대학원 졸업. 고교생 때 ‘신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신학을 공부하려 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부모의 반대에 부닥친다. 누나의 권유로 건축가가 됐다. 현재 건축연구소 ‘이로재(履露齋)’ 대표이며 미국건축가협회 명예회원이다. 파주 출판도시 건설을 지휘했고 수졸당·수백당·웰콤시티 등으로 여러 건축상을 수상했다. 2011 광주 디자인비엔날레에 총감독으로 참여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