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혹행위 못 이긴 자살, 타살이나 마찬가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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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꼭 오늘입니다. 남자라면 육군에 가야 한다고, 군에 가서는 스스로 자랑스럽다며 편지를 보내던 아들이 총으로 목숨을 끊은 날이…. 그런데 10년이 지난 지금도 왜 똑같은 일이 우리 대한민국 군에서 계속 일어나는 겁니까.”

 인천 해병대 2사단 총기 난사 사건에 이어 해병대 1사단 병사의 자살 소식이 전해진 11일 “지금도 군인들만 보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는 박봉순(55)씨를 전화로 만났다. 박씨의 아들 유장현 이병(당시 20세)은 2001년 3월 입대해 일산 9사단 백마부대로 자대배치를 받은 지 37일 만에 사망했다. 가혹행위를 견디다 못한 총기 자살이었다. 박씨는 얼굴을 공개하는 것은 꺼렸다. “지난 10년 세월, 아들과 오빠, 손자를 가슴에 묻고 살아온 가족들의 마음이 다시 힘들어질 것 같아서”라고 했다. 지난 주말엔 벽제 임시 봉안소에 안치된 아들을 만나고 왔다고 했다. 박씨는 “해병대 총기 사건의 가해자도 결국은 피해자”라며 “모든 것을 개인 문제로 돌리는 군의 자세가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군이 사건을 은폐한다는 얘기인지.

 “병사 자살 사건이 나면 군에선 맨 먼저 성격, 여자, 가족 문제로 몰아갑니다. 요즘 보도를 보면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란 생각이 들어요.”

 -10년 전 유 일병 사건 때는 어땠습니까.

 “우리 아들도 처음엔 여자 문제로 자살했다고 하더라고요. 군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 진정을 내고 가혹행위가 있었다는 진실을 찾기까지 7년이 걸렸습니다. 최근 해병대 총기 사건을 통해 드러난 성추행, 구타, 모멸감. 모두 우리 아들이 당한 것들입니다. 저한테 쓴 편지도 보낼 수 없었고요. 군에선 그 편지들을 제가 요구하기 전에는 먼저 주지 않았습니다. 사고 직후 헌병대에서 병사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내용도 복사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밤 12시까지 손으로 베껴서 왔습니다.”

 박씨는 아들의 군복 입은 모습을 사진으로만 봤을 뿐 실제론 보지 못했다. “사고가 난 뒤 남편이 아들의 예쁜 모습만 기억하라고 했어요. 마지막 모습을 끝내 보지 못했습니다.”

 유 이병은 성균관대 화학공학과 2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이모부가 공군 장교였다. 가족들은 공군에 가라고 했지만 ‘남자라면 육군에 가야 한다’며 육군을 택했다. 대학에서 동아리 회장을 맡는 등 성격도 쾌활했다.

 -가해자들은 찾으셨는지.

 “수사가 끝난 후 군에서 가해자들을 어떻게 할지 묻기에 ‘자식 키우는 마음이 똑같은데,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게 가끔씩 후회되기도 합니다. 병영 내 가혹행위가 계속되도록 방조했다는 생각도 들고, 장현이의 순직 인정 소송에도 불리하게 됐다는 자책도 들고요.” 선임병들이 이불을 덮어씌워 아들을 구타하고, 각종 가혹행위를 했다는 수사결과를 남편과 딸(유 이병의 동생)에겐 차마 알리지 못했다. “말이 자살이지 타살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박씨는 사고 후 이사를 했지만 아들 방에 유품을 그대로 두고 있다고 했다. ‘엄마, 오늘 자살방지 교육을 받았어요. 물론 나랑 상관없는 일이지만요.’ 훈련소에서 아들이 쓴 편지를 볼 때마다 박씨의 애는 끊어지는 듯하다.

 -아직도 유골을 임시 봉안소에 둔 이유는.

 “자살은 어떤 이유에서건 순직 처리 하지 않는 법규정과 싸우는 중입니다. 우리 아들 묻을 땅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나라 지키겠다고 군대로 간 착한 아들의 죽음을 국가가 이렇게 나몰라라 할 수 있습니까.” 

김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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