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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의 시시각각

‘럭비공’ 홍준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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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1996년 4월 총선에서 국민 앞에 등장한 이래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는 주목받는 정치인이었다. ‘6공 황태자’ 박철언을 잡아넣은 검사 출신인 데다 대표적인 ‘DJ 저격수’로 나섰기 때문이다. 시련도 있었지만 그는 꾸준히 전진했다. 대통령후보 경선에도 나갔고 원내대표를 지냈으며 4선 중진에 올랐다.

 그의 성장은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불안한 것이었다. 장점만큼 단점도 많았던 것이다. 그는 소탈하고 과감했지만 신뢰감을 위협하는 언행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정치권과 언론에선 그의 불안정성을 걱정하는 시각이 많다. 일부 가혹한 비판자들은 ‘럭비공’ 표현도 주저하지 않는다.

 이번에 많은 당원이 그를 선택한 것은 성숙한 변신을 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지자들은 홍 대표가 책임감과 돌파력을 원숙하게 다듬어 내년 4월 총선을 이끌어주기를 바란 것이다. 그런데 그런 희망이 지금 위험에 처해 있다.

 홍 대표는 우선 품위라는 과목에서 시험에 들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그는 권위주의와 권위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 같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을 찾아간 그는 국민이 보는 앞에서 응접실 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했다. 홍 대표에게 YS는 고마운 존재다. 그에게 공천을 주었고 1999년 3월 그가 의원직을 잃었을 때는 집으로 불러 2시간 동안 위로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런 개인적인 큰절은 국민이 보지 않는 곳에서 해야 하지 않을까.

 집권당 대표는 항상 절도와 품격을 유지해야 한다. 홍 대표가 가볍게 처신하니 YS가 집권당을 깔보고 망언을 했다. YS는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외국 정상들이 잇따라 방한을 요청했다”며 “그 전에는 군사정권, 박정희(처럼) 쿠데타한 놈들이니까 안 왔다”고 했다. 한나라당의 뿌리는 보수·우파 근대화 세력이며 그 태두(泰斗)가 박정희다. 더군다나 박 전 대통령은 차기 대통령에 가장 근접한 박근혜 전 대표의 아버지다. 그런 사람을 YS는 ‘놈’이라고 했다. YS의 망언은 국가에 대한 훼절이요, 한나라당에 대한 모욕이다. 대표가 가벼우니 당이 모욕을 당하는 것이다.

 홍 대표는 손학규 민주당 대표에게 인사를 가서도 “형님, 내가 당 대표가 됐다”고 했다. ‘형님·동생’ 하는 인간관계는 조용히 그들끼리 즐길 일이다. 집권당 대표가 제1 야당 대표를 상대할 때는 적절한 긴장과 품위를 유지해야 한다. 제1 야당이 항상 정쟁의 각(角)을 세우기 때문이다. 그런데 집권당 최고지도자가 국민과 당원 앞에서 야당 대표를 “형님”이라고 했다. 대표 회동이 무슨 집안의 회갑잔치라도 되는가.

 홍 대표는 보수·우파·주류 집권당의 대표로서 철학과 정체성에 심각한 의문을 주고 있다. 그는 6년 전 정강·정책을 주도하면서 포퓰리즘을 규탄했다. 그런데 지금은 “우파 포퓰리즘은 괜찮다”라는 희한한 논리를 펴고 있다. 급기야는 어제 TV 대담에서 ‘대기업’ 하면 떠오르는 느낌이 “착취”라고 했다. 우파·주류 정당의 대표라면 ‘일자리’나 ‘성취’라고 했어야 한다. 일단 대기업의 기여와 역할을 인정하면서 ‘횡포’ 같은 문제점을 공격해야 한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자영업·비정규직·서민을 얼마나 많이 먹여 살리는가. 착취라니, 홍준표는 급진좌파 정당 대표인가.

 정치인 홍준표는 1996년 총선 때 불법자금 2400만원을 뿌린 잘못으로 의원직을 잃은 적이 있다. 사면·복권 덕분에 돌아왔지만 국민에 대한 부채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렇다면 신중하고 품위 있는 행보로 정치인생의 구멍을 메워가야 한다.

 홍 대표가 ‘럭비공’ 처신을 계속한다면 한나라당은 새로운 위기를 맞을 것이다. 선거 참패에서 벗어나려 새 대표를 뽑았는데 더 큰 위기가 올 수도 있는 것이다. 럭비공은 아무 곳으로 튀지만 럭비선수는 그런 공을 잡아 골대로 전진한다. 홍준표는 럭비공이 될 것인가 아니면 구당(救黨)의 럭비선수가 될 것인가.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