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56) 별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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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제12회부산국제영화제(PIFF) 개막식에서 배우 신성일·엄앵란씨 가족이 포즈를 취하고있다. 왼쪽 끝은 작은딸 강수화씨. 엄씨가 설립한 싱싱김치 대표로 있다. [중앙포토]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결혼 생활 아닌가 싶다. 하물며 사생활이 공개된 우리 부부는 어떠했으랴. 1964년 11월 14일 결혼식이 끝난 후에도 일상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나는 영화 출연으로 더 바빠졌고, 엄앵란도 촬영 중인 몇 작품을 마무리해야 했다.

 사실 양가가 결혼을 썩 반기는 처지가 아니었다. 내 어머니는 악극계 집안이라는 이유로 엄앵란을 좋아하지 않았다. 장모 노재신 여사는 1939년 이명우 감독의 ‘홍길동전’으로 데뷔해 61년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을 끝으로 은막을 떠난 선배 연기자였다. 또 아내의 스케줄을 꽉 쥐고 관리했다. 아내의 삼촌 엄토미(본명 엄재욱)는 색소폰 및 클라리넷으로 명성을 날리는 연주자였다. 어머니의 바람은 공미도리같은 명문가 며느리를 들이는 것이었으리라. 아내가 한 살 연상이라는 점도 어머니를 불편하게 했다.

 처가 쪽도 뭔가 손해 본 느낌이었다. 엄앵란은 집안의 기둥이었다. 부모와 여동생, 그리고 친척들이 하늘같이 떠받들고 살았다. 그 쪽에선 아내가 영화배우 생활을 더 하길 바란 것 같다. 하지만 아내는 당시 29살. 과년한 나이였다.

 아내는 몸만 왔다. 내가 결혼 전 “몸만 오라”고 했지만 정말로 그렇게 할 줄이야. 나는 아내가 배우를 접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살이 찌는 체질이어서 더는 연기 생활이 힘들어 보였다. 돈은 내가 버니 결혼 생활만 잘 해주면 됐다. 사실 엄앵란만한 아내도 없었다. 새벽까지 촬영하고 귀가 못하는 날이 많은 배우라는 직업을 일반인은 이해하기 힘들다. 엄앵란은 영화계를 이해하고 나를 도와줄 수 있는 면에서 최고였다.

 새댁 엄앵란은 결혼 후 애매한 처지에 놓였다. 젊은 시절부터 살림을 할 겨를이 없었고, 시어머니가 부리는 사람이 5명 정도 됐다. 빨래·청소 등은 이들의 몫이니, 아내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시어머니 입장에선 뭔가 탐탁하지 않은 며느리였다. 시댁이 불편한 아내는 아침에 내가 나가면 촬영을 핑계 대고 약수동 친정으로 갔다. 시어머니 눈에 계속 날 수밖에. 고부 갈등이 깊어졌다. 65년 7월 초, 아내에게 한마디 했다.

 “여기가 하숙집이냐.”

 말다툼을 했다. 손찌검으로 이어졌고, 아내는 심하게 저항했다. 그 바람에 또 다시 손찌검이 됐다. 밥을 먹던 나는 딱 한마디로 내 기분을 표현했다. “나가.”

 아내는 주섬주섬 짐을 챙겨 한 달 전 태어난 큰 딸을 업고 처가로 떠나버렸다. 자연스럽게 별거가 됐다. 6개월 가까이 됐던 것 같다. 영화계에선 이혼 직전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마침 부산일보가 주최하는 ‘부일상’에서 내가 주연상을 타게 됐다는 기별이 왔다. 부일상 조직위원회는 ‘모일 모시, 부산 제일극장에서 시상식이 있다. 반드시 엄앵란을 동반해달라’는 조건을 붙였다. 우리 부부가 정말로 이혼했는지 떠 보려는 모양이었다. 엄앵란을 동반하지 못한다면 소문이 기정사실화 되는 셈이다. 부산일보가 이혼 기사를 터트려버릴지도 몰랐다. 처가에 간 아내와는 아직 화해도 못했는데…. 정말 난처한 상황이었다.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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