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취재일기] 인터넷 안 되는데 공짜 태블릿 …‘탁신표’ 포퓰리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5면

정용환
특파원

지난 1일 오후 태국 수도 방콕 중심가의 화랑폼역 대합실. 북동부 우돈타니 출신인 정비공 스윗 바니자카(39)는 고향으로 가는 열차표를 쥐고 있었다. “꼭 투표할 겁니다. 탁신을 저버릴 수 없어요.” 이날 화랑폼역에는 스윗 같은 농촌 출신 노동자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이틀 뒤 실시된 총선에서는 푸어타이당이 의석 과반수를 차지해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이 당은 쿠데타로 축출된 탁신 친나왓 전 총리가 막내 여동생 잉락을 총리 후보로 내세워 막후에서 사실상 지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표 방송으로 떠들썩한 푸어타이당사 1층 기자실 구석에서 기사를 쓰다 스윗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을 투표장으로 끌어당기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이번 선거에서 푸어타이당과 여당인 민주당은 이전에 탁신이 그랬듯이 경쟁적으로 포퓰리즘적 공약을 남발했다. 도시 빈민과 농어민층이 선거의 승패를 가르는 최대 표밭이다 보니 당장 이들의 눈에 들 공약을 급조해 앞뒤 가리지 않고 쏟아낸 것이다. 도시 중산층 이상의 계층과 나머지 빈곤선을 오가는 서민들의 빈부 격차가 워낙 커 여야 가릴 것 없이 포퓰리즘 성격의 공약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측면이 한편으론 이해가 된다.

탁신(左), 잉락(右)

 하지만 그것도 정도의 문제다. 선거 막판 탁신당과 민주당이 꺼내든 포퓰리즘 카드들은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는 것도 있다. 탁신당은 초등학생 80만 명에게 태블릿PC를 나눠주겠다고 약속했다. 태국엔 초고속무선인터넷망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태블릿PC를 뿌린들 제대로 쓸 수도 없다. 허망한 얘기다. 최저임금을 40% 올리겠다는 공약도 했다. 민주당도 최저임금을 25% 올리고 학생·장애인·노년층은 대중교통을 무료로 이용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농민들에겐 국유경작지를 개방하겠다며 기대를 부풀렸다.

 지난달 방콕대연구소는 태국 경제학자 73명을 대상으로 양당의 공약 실현 가능성 조사를 했다. 푸어타이당의 공약을 이행하려면 1년 예산의 4배가량인 1조8500억 바트(약 64조6000억원)가 필요하고 민주당은 2배인 8500억 바트가 투입되어야 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어느 당이 집권하든 재정 파탄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벌거벗은 포퓰리즘 공약의 진실이다. 세금을 더 걷든지, 교육·복지 예산을 줄이든지 해야 하는데 이럴 경우 극심한 사회적 반발을 피해 갈 수 없다.

 잉락 총리 후보는 이런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선거에서 이겼다고 나라 곳간을 털어 지지자들에게 풀다간 반탁신 진영의 선거 결과 불복, 거리 시위, 쿠데타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가 되풀이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탁신당에 표를 주기 위해 밤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갔던 스윗의 바람은 당장 눈앞에 떨어질 태블릿PC가 아니었을 것이다. 압승을 통해 얻은 정국 안정을 바탕으로 경제개혁에 매진해 성장의 과실을 골고루 분배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달라는 것이 이번 선거에서 표출된 진짜 민심이 아니었을까.

태국 방콕에서 정용환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