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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극빈층에 돈 펑펑 … ‘오뚝이’ 탁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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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태국 총선 다음 날인 4일(현지시간) 방콕 시내에서 한 시민이 제1야당인 푸어타이당의 승리를 게재한 신문을 읽고 있다. 표지를 장식한 잉락 친나왓은 탁신 전 총리의 막내 여동생으로, 이번 총선 승리로 태국 사상 첫 여성 총리가 될 예정이다. [방콕 로이터=뉴시스]


3일 총선에서 태국의 제1야당인 푸어타이당이 전체 500석 중 265석의 단독 과반을 확보하는 대승을 거두자 해외에 도피 중인 탁신 친나왓 전 총리가 이를 가장 반겼다. 그의 막내 동생인 잉락 친나왓이 이끄는 푸어타이당이 사실상 탁신의 정당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선거는 쿠데타로 축출된 ‘탁신의 승리’와 동일시되고 있다.

탁신 전 총리

 탁신은 2006년 군부 쿠데타로 축출됐다. 하지만 쿠데타를 전후해 지난 10년간 5차례 선거에서 5연승하며 승부사 기질을 보여줬다. 태국에선 쿠데타로 19명의 총리가 쫓겨났지만 이렇게 선거 때마다 표를 끌어모으는 괴력을 발휘하며 정치적 무덤에서 되살아난 사례는 탁신뿐이다. 군부와 반탁신 세력의 줄기찬 공세에도 불구하고 나라 밖에서 원격 지휘하며 ‘탁신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원동력은 무엇일까.

 우선 탁신은 역대 어느 정치인도 누려보지 못한 탄탄한 정치적 지지 기반을 갖고 있다. 지역적으로 북부와 북동부 농촌에서 무더기 표가 쏟아졌다. 이번 선거에서 이 지역의 193석 가운데 79%인 152석을 탁신당(黨)이 쓸어갔다.

 북부 치앙마이 출신인 탁신은 총리 재임 시절 30바트(약 1000원)만 내면 의료보험 혜택을 받도록 해줬다. 농민과 도시 서민들이 가장 큰 혜택을 봤다. 또 농가 부채를 대폭 탕감해주거나 지불을 연기시켜줬다. 도시 중산층과 식자층은 포퓰리즘이라며 적개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다른 쪽에선 탁시노믹스라고 환호했다.

 이렇게 쌓은 친서민 이미지는 거부(巨富) 탁신의 최대 정치적 자산이 됐다. 4일 방콕의 민영병원에서 만난 니핏 박사는 “탁신당이 대중영합적이고 부패했다고 비난을 받았지만 이는 민주당 집권기에도 비켜가지 않은 태국 사회에 만연한 현상이라는 것을 보여줬다”며 “방콕의 중산층이 민주당에 대한 실망을 표로 보여줬다”고 말했다. 탁신당에 투표했다는 택시기사 프라윤은 “부패하긴 마찬가지라면 탁신에게 미래를 맡기고 싶다”고 말했다.

 계층 갈등이 첨예한 태국 사회에서 탁신처럼 서민과 농어민, 극빈층을 조명한 정치인은 드물었다. 6400만 명 인구 절반이 극빈층에 가까운 생활고에 시달리는 태국에서 포퓰리즘 정책은 들지 않을 수 없는 독배의 성격이 있다. 이 표밭을 챙기지 않고서는 선거에 뛰어든다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푸어타이당 못지않게 집권 민주당도 이번 선거에서 최저 임금을 25%씩 올리고 극빈층에 현금을 지원하는 등 선심성 공약을 남발했다. 하지만 민주당 정권 때 치솟은 물가로 인해 서민들의 생활고가 더욱 악화됐기 때문에 포퓰리즘의 약발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오뚝이 탁신’이 가능했던 또 다른 요인은 지지자들을 규합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지원할 수 있는 자금력이다. 공식적으로 드러난 탁신의 재산은 766억 바트(약 2조6700억원)에 달한다. 탁신 집안이 운영하는 회사들도 태국에서 우량기업이다. 방콕 외교가에서 만난 한 외교관은 “쿠데타로 물러난 역대 총리들과 달리 50대였던 탁신은 물러서지 않고 금기에 도전했다는 점에서 태국 정치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화려한 승리를 거둔 탁신은 4일 “국민의 뜻을 존중하지 않으면 평화가 있을 수 없다”고 태국 P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이번 선거에 담긴 메시지를 ‘평화와 안정에 대한 국민들의 염원’으로 규정했다.

방콕=정용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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