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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체첸반군 사이버 전쟁

중앙일보

입력

러시아에서도 가상전쟁, 사이버 전쟁, 제 4전선이 유행어다. 이 유행어가 러시아도 인터넷 및 정보통신분야에서 서방 IT산업 선도기업·국가들과 경쟁에 들어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이 유행어는 서방진영에서와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여론전쟁, 敵에게 유리한 사이트에 대한 해킹 및 러시아 정부 사이트에 대한 외부 해킹에 대응하는 방어벽 구축 등을 주로 일컫는다.

그로즈니에서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지던 지난 2월 초, 러시아와 체첸반군간의 전투는 그로즈니 인근은 물론이고 사이버 공간에서도 치열하게 벌어졌다. ‘www.infocenter.ru’등 러시아측 사이트엔 시시각각 러시아군의 승전보가 올라왔다. 반대로 체첸반군측의 ‘www.ichkeria.com.ge’등엔 러시아군의 승전보를 뒤집는 내용의 정보들이 떴다.

현지에 특파원을 보내지 못했던 대다수의 러시아 언론 및 모스크바 주재 서방언론사들은 밤새도록 양 사이트를 오가며 실시간으로 뜨는 정보내용을 검색했다. 어느 사이트가 진실에 가까운지는 제대로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러시아측 사이트가 제공하는 정보가 신빙성이 있다는 조짐들이 나타났다. 러시아군이 그로즈니를 점령하고 현지에 파견된 러시아 종군기자들의 현장리포트가 나오면서 러시아측 사이트들은 더욱 빠르고 풍부한 정보를 공급했다.

반면 체첸반군의 사이트엔 그로즈니 함락여부에 관한 내용이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체첸반군 지도부가 그로즈니를 전략적으로 포기하고 러시아군의 포위에도 불구하고 2천여 명의 병사들이 무사히 탈출, 산악지대에서 게릴라戰을 시도하고 있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물론 즉각적으로 러시아 사이트엔 그로즈니 함락과정에서 체첸반군 5백여 명이 사살됐으며 현재 섬멸작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들이 올라왔다.

이처럼 양 사이트는 상황마다 실제 전장(戰場)
이상 가는 치열한 논리싸움과 정보싸움을 벌이고 있다. 러시아군이 그로즈니를 점령한 후 팽팽한 접전이 계속되던 사이버전쟁에서도 러시아측 사이트의 우세가 점차 두드러지고 있다. 러시아측 사이트인 로스인포름 사이트나 親러시아 체첸민병대가 운영하는 ‘www. chechnya.ru’ 등에 뜨는 정보들이 양과 질, 속도면에서 체첸반군측의 ‘www.kavkaz. org’,‘www.ichkeria.com.ge’등을 압도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동안 양측의 사이트를 계속 지켜보면서 정보의 흐름을 분석하던 사람들은 체첸반군측 사이트들의 대응능력 저하를 보고 전황이 일대전기를 맞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개전초 체첸반군은 웹 사이트를 통해 러시아 정부 및 러시아 국방부를 우롱, 사이버 전쟁의 기선을 제압했다. 그러나 러시아측이 사이버 전쟁의 대응을 선언하고 로스인포름을 결성해 즉각 대응에 나서던 지난해 11월 초부터 양상이 달라져 양측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어느 쪽 사이트가 진실에 가까운지 혼란을 주기도 했지만 주의 깊은 관찰자라면 양측 사이트를 통해 전투의 흐름을 어느 정도는 읽어낼 수 있었다.

러시아군 부사령관 미하일 말로페예프 준장이 실종됐을 때의 일이다. 체첸반군측 사이트들은 말로페예프 준장을 자신들이 포로로 잡아 신문하고 있다는 센세이셔널한 뉴스를 올렸고 이 소식은 즉각 전 세계에 타전됐다.

그러자 러시아측 공식 사이트들은 즉각적으로 말로페예프 준장은 포로로 잡힌 게 아니라 전투중 사망했으며 장군의 시신을 러시아군이 회수해 장례식을 치렀다고 주장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러시아측 사이트의 주장이 사실로 밝혀졌고 체첸반군측의 ‘www.ichkeria.com.ge’도 지난 1월 20일 결국 말로페예프 장군의 사망을 시인했다. 이 사건은 체첸반군측 사이트의 신뢰성에 큰 흠집을 냈다.

그러나 체첸반군측은 즉각 러시아군의 사망자 수가 축소됐다는 주장을 인권단체들과 연계해 확산시키면서 반전을 시도했다. 반군측 사이트는 러시아군이 지금까지 약 1만1천 명 사망했다고 주장,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러시아측은 즉각 체첸측 주장과 반대로 체첸반군이 1만 명 이상 사망했다는 내용을 사이트에 올렸으나 정보를 조작하고 있다는 의혹을 샀다.

21세기 벽두 체첸전에서 보여준 사이버 전쟁은 이제 사이버 전장이 새로운 전쟁터로 부각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러시아측은 코소보 사태 후부터 사이버 전쟁을 담당하는 조직을 내부적으로 구성,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술적 책임은 전자정보전에서 세계 최고 수준인 ‘팝시’(러시아 연방정부 통신 및 정보국)
가 담당하고 있고 내용은 범정부 선전戰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체첸반군측의 사이트는 사실상 서방정보기관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러시아와 체첸간의 사이버 전쟁은 러시아 對 서방의 사이버 간접 전쟁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중앙일보 모스크바 특파원·for NWK = 김석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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