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대 멘 허창수 … 재계 “전경련, 반기업 정책 대응 안 하면 회비 못 내겠다” 압박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2면

본지 6월 22일자 2면.

2008년 10월 허창수 GS그룹 회장은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위해 포스코와 꾸렸던 컨소시엄을 깼다. 조선업을 미래 신수종 사업으로 정하고 포스코와 공동으로 인수에 나섰으나 입찰 가격에 대한 두 회사의 의견 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포스코와 불화를 겪기도 했지만, 덕분에 GS와 포스코는 인수전 직후 들이닥친 미국발 금융위기 여파에서 비켜설 수 있었다.

 허 회장은 이처럼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이 맞다고 판단되면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다. 대신 판단을 내리기 전까지 다양한 의견을 들으면서 장고한다. 허 회장이 24일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과 가진 첫 경제5단체장 상견례에서 “오늘날 중요한 정책 결정에서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는 순수하고 분명한 원칙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 의문”이라고 뼈 있는 인사말을 한 것도 오랜 고민 끝에 나온 것으로 재계는 보고 있다. 이날 인사말의 초안은 전경련 경제정책팀이 만들었지만, 핵심적인 부분은 허 회장이 직접 가필한 것으로 알려졌다.

 허 회장은 지난 2월 말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직에 오른 뒤 각계각층 인사들을 만나 얘기를 들었다. 초과이익공유제나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 강화, 중소기업 적합 업종 선정 등 민감한 이슈에 대해 말을 아끼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각계의 의견을 구하는 정중동 행보를 계속했다. 전경련에서도 업무 보고를 받는 것은 물론 팀장들과 두 차례 저녁 식사를 하며 현안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이달 초엔 주말을 이용해 비공식으로 회장단 골프 모임을 가졌다. 취임 100일을 전후한 시점이었다. 재계에서는 허 회장이 취임 후 100일 동안 각종 현안을 보고받고 어떤 입장을 취할지 고심한 뒤 최종적으로 회장단 골프 모임에서 방향을 정리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 재계의 중지를 모은 것이다.

 그 첫 결과물이 지난 21일 정치권을 겨냥한 강도 높은 비판이다. 허 회장은 “포퓰리즘 하는 사람들이 잘 생각하고 내놓는 것이 아니라 즉흥적으로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허 회장이 이처럼 강경한 면모를 보인 배경에는 대기업에 대한 압박의 도가 지나치다는 재계 전반의 인식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들어 정부와 정치권은 초과이익공유제, 공적 연기금의 주주권 강화 등을 통해 압박의 강도를 높였다. 4·27 재·보선에서 여당이 패하자 여당마저도 예정돼 있는 법인세 감세를 철회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재계가 글로벌 위기 극복을 위해 앞장서고, 투자와 고용을 대폭 늘리고 있음에도 대기업이 양극화의 주범인양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사회 분위기마저 번지고 있다. 이에 따라 기업들에 ‘더 이상 물러서면 안 된다’는 위기감이 커지면서 재계 수장인 허 회장이 결국 전면에 나선 것이라는 평가다. 허 회장이 나서기 전, 전경련에는 위기감을 느낀 회원사들로부터 “상황이 이런데 전경련은 대체 뭐 하는 거냐. 회비를 내지 않겠다”는 항의가 쏟아지기도 했다.

  전경련에 이어 다른 단체도 목소리를 보태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를 비롯한 전국상공회의소 회장단은 23일 경북 구미에서 정례회의를 하고 “법인·소득세율을 인하해 기업의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공동 발표문을 채택했다.  

심재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