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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년 만의 귀향, 조선왕실 의궤는 그날을 기억할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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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호 29면

김형우 박사는 강화도를 역사체험학습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신동연 기자
고려궁지 안에 복원해 놓은 강화도 외규장각. 안에 복제 의궤가 진열돼 있다.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 ‘1만 개의 시냇물에 비친 밝은 달의 주인장’은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던 정조(正祖:1752~1800년)가 스스로 지은 호다. 하늘의 달은 하나지만 지상에 있는 수많은 시냇물에 똑같이 비친다. 따라서 시냇물이 1만 개면 달도 1만 개가 된다. 하지만 하늘에 있는 달은 오직 하나일 뿐이다.달은 군주이고 시냇물은 백성을 상징한다. 이런 인식은 군주와 백성이 하나라는 군민일체론(君民一體論)을 낳고 탕평책으로 이어진다. 군주와 백성이 모두 나라의 주인이다. 정조는 ‘민국(民國)’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사색이 머무는 공간 <63> 강화도 외규장각(外奎章閣)

자신의 분신인 백성이 천대받는 걸 묵과할 수 없었던 그는 노비제도의 혁파를 결정한다.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민국정치’가 더 빛을 보지 못한 건 역사의 비극이다. 자생적 근대화의 싹이 잘린 셈이기 때문이다.‘유학적 계몽군주’ 정조는 국립도서관 규장각을 중심으로 과거사를 정리하고 앞으로 나아갈 바를 모색하는 연구·편찬사업을 왕성하게 벌였다. 왕실의 여러 행사에 관한 어람용 의궤도 화려하게 제작됐다. 의궤란 왕실 혼례, 세자 책봉, 왕실 장례, 궁궐 건축과 같이 국가나 왕실의 중요한 행사의 전말을 그림을 곁들여 기록한 것이다. 이 의궤와 함께 희귀한 서책을 영구히 보전하기 위해 설치한 규장각 부속 도서관이 강화도 외규장각이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 극동함대 로즈 제독이 7척의 군함을 이끌고 상륙한 갑곶(甲串) 돈대. 신동연 기자

11일 강화도·경복궁에서 환수 기념행사
강화도 외규장각에는 약 6000책이 소장돼 있었는데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외규장각 건물과 함께 대부분 불탔다. 의궤를 포함한 중요 도서 약 300권은 프랑스군이 약탈해 갔다. 외규장각 건물은 2002년 복원했다. 외규장각 도서도 우여곡절 끝에 올해 5월 27일, 297책(의궤 294책)이 반환돼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이번 주 토요일(11일), 외규장각 도서 환수 기념행사가 강화도와 경복궁 근정전 앞에서 각각 예정돼 있는데 이봉(移封) 행렬, 고유제(告由祭), 축하공연 순으로 열린다. 이봉은 왕의 영지나 물건을 옮기는 일이고 고유제는 중대한 일을 치른 뒤 천지신명(天地神明)께 그 내용을 고하는 제사다. 장엄한 이봉 행렬은 정조부터 고종 때까지 규장각에서 기록한 일기를 근거로 재현된다.
강화도에 진본 의궤가 다시 오는 건 프랑스로 반출된 지 145년 만이다. 고급 초주지(草注紙)를 쓰고 화려한 비단 표지와 놋쇠 물림, 둥근 고리로 장정한 의궤는 세계출판문화사상 희귀본으로 꼽힌다. 선명하고 정교한 반차도와 도설을 담고 있는 진본 의궤는 강화군민들은 물론 온 국민이 보고 싶어 하는 문화유산이다.

강화도는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불린다. 127점의 지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강화도는 역사와 문화의 향기를 간직한 보물섬이다. 이번 외규장각 도서 환수 기념행사는 고려대장경 1000년 축전, 선사시대 고인돌 축제와 맞물려 한 번쯤 강화도를 찾아가고 싶게 한다.

한반도 지도를 펼쳐 놓고 강화도의 형국을 들여다본다.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이 바다에 몸을 푸는 지점에 놓인 네 번째로 큰 섬이 강화도다. 서울과 개성으로 통하는 수로를 여닫는 뚜껑 같기도 하고 국토의 심장부를 막아 주는 방패 같기도 하다. 강화도는 한국사를 집약해 놓은 터이자 한반도를 응축해 놓은 온전한 섬이다. 실제로 국난을 당해서는 하나의 독립국 구실을 하기도 했다. 민족성지 참성단이 있는 마니산 정상에 올라 보면 사방으로 질펀하게 열린 시야에 신성한 기운이 그윽하다. 세계적인 갯벌과 비옥한 토지는 풍부한 물산을 양산해 수준 높은 문화를 꽃피워 냈다. 강화도는 고려시대 항몽기에는 수도가 되기도 했다. 궁성과 중성, 외성 이렇게 삼중성을 쌓아 저항했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후에도 강화도는 외적과 맞서 싸우는 ‘제1의 보장지처’로 여겨져 왔다.

복원된 외규장각 건물은 고려궁지 안에 있다. 북산 기슭 가파른 계단을 올라 고려궁지에 들어설 때마다 답답함을 느끼곤 한다. 아무리 피란지에 세운 궁궐터라고 하지만 고려궁지는 강화유수부나 이궁터보다 협소하다. 39년간 고려의 황궁 자리가 아니었던가. 고려시대에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규모가 컸으리라는 게 사학자들의 의견이다. 북산을 등지고 앞쪽과 왼쪽으로 상당히 넓은 공간이 궁궐터였다는 얘기다.

“이곳에 서면 감탄하면서 볼 수밖에 없다.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어디든지 책이 있는 것이다.”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를 침공한 프랑스 해군장교 주베르가 남긴 기록이다. 문화국 국민임을 자랑하는 프랑스인의 이 고백은 남의 나라 문화재 약탈을 자행한 그들의 심리 이면과 함께 우리가 생각해야 할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병인양요는 대원군이 프랑스 천주교 선교사 9명을 극형에 처한 것에 대한 항의와 보복성 군사작전으로 일어났다. 중국 즈푸(芝<7F58>)항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극동함대 로즈 제독은 10월 11일 군함 7척을 이끌고 원정을 나서 14일에 강화도 갑곶진에 상륙하고 16일 강화부를 점령한다. 조선은 순무사 이경하(李景夏), 천총 양헌수(梁憲洙) 등 무장들에게 문수산성과 정족산성을 수비하게 한다. 11월 7일 프랑스 해병 160명은 대령 올리비에의 지휘로 정족산성을 공략하려다가 양헌수가 이끈 사수 500명의 공격을 받고 갑곶으로 패주했다. 11일 프랑스군은 한 달간 점거한 강화성을 철거하면서 관아에 불을 지르고 중국으로 떠났다. 그들의 군함에는 약탈한 은금괴(銀金塊)와 대량의 서적·무기·보물 등이 실려 있었다.

역사체험 학습장소로 잘 활용해야
강화도 사람들은 어떻게 손을 써 보지도 못하고 지켜봐야 했다. 이조판서를 지낸 이시원(李是遠·1790~1866)이 아우 지원과 함께 자결했다. 10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로 일하던 박병선 박사가 파손도서 창고에서 의궤를 발견한다. 우리 학계와 정부의 집요한 의궤 반환 요청작업이 시작됐고 마침내 그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강화도는 문화재의 보고다. 한 걸음만 떼도 문화재가 밟힌다. 그래서 내딛는 발걸음이 조심스러울 정도다. 어디든 땅을 파 보면 유물 파편이 나온다고 한다. 처음부터 고도(古都)로 지정돼 체계적인 발굴을 하고 그에 맞게 개발했어야 옳았다. 강화도에는 의문점과 논란이 많다. 재조(再雕) 대장경 판당의 위치, 집정 최이와 최항의 무덤 등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강화군은 고도로 지정된 경주나 부여·공주·익산과는 다른 매력이 있는 곳입니다. 수도권에 자리 잡아 접근성이 좋고 선사시대부터 근대화 시기·분단현실까지 통시적인 학습효과가 가능합니다. 부근리 고인돌 주변, 마니산, 고려궁지와 용흥궁 주변, 갑곶돈대, 광성보는 주변 지형을 변경하지 말고 잘 정비해 체험교육 장소와 문화공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강화도는 초·중등 학생들이 많이 찾고 있습니다. 며칠간 머물면서도 지루하지 않고 중복되지 않는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끊임없이 개발하는 시스템이 가동돼야 합니다.” 강화역사문화연구소 김형우(56) 소장의 제안이다.

“강화 사람들은 자존심이 강하고 부지런합니다. 그래서 잘살았지요. 그런데 서울과 가까우면서도 교통망이 낙후돼 1990년대 중반까지 자동차로 5시간씩이나 걸렸어요. 이제는 서울 도심에서 1시간 반이면 올 수 있습니다. 강화가 약동합니다. 교동연륙교가 한창 건설 중이고요. 주민 의견을 수렴하고 환경을 생각하면서 강화도와 석모도 사이에 조력발전소도 세우려고 합니다. 생물자원의 보고인 강화 남단갯벌은 훼손하지 않아야겠지요.” 취재현장에서 만난 행정가 출신 안덕수(64) 군수는 신중했다.

갑곶돈대에 섰다. 갑곶은 갑옷만 벗어 쌓아 놓아도 건널 수 있을 만큼 수심이 얕다 해서 생긴 지명이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구왕이 봉림대군에게 항복하라고 재촉했던 곳이며 병인양요 때는 물론이고 1876년 일본과 체결한 강화도조약도 이곳으로 상륙한 일본 사신의 요구로 맺어졌다.
강화도는 바다와 갯벌로 둘러쳐진 천혜의 요새였다. 외적의 침략에 시달렸던 우리 선조들은 이 천혜의 요새에 마니산·정족산 사고(史庫)와 외규장각을 세웠다. 개화기 전야, 외규장각은 프랑스 군대에 약탈당하고 불태워졌다. 그 이후로 강화도는 더 이상 요새가 아니다.

치열한 역사의 현장 강화도는 신화가 숨 쉬는 곳이기도 하다. 한반도를 둥지에 깃든 봉황으로 친다면 강화도는 봉황이 품고 있는 알과 같은 존재다. 알 속에는 흰자와 노른자뿐이지만 부화하면 온전한 생명체인 새끼 봉황이 된다. 인고의 세월을 견디며 알을 깨고 나온 새끼 봉황이 세계를 향해 문화를 노래하는 길조(吉鳥)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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