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진의 시시각각

우려되는 황우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한국의 현대사에는 자신의 선택으로 역사를 바꿀 수 있었던 인물들이 있다. 황우여 한나라당 원내대표도 그런 사람이다. 1997년 11월 한국의 보수·우파는 건국 50년 만에 최대의 정치적 위기에 빠졌다. 진보·좌파로 정권이 넘어갈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후보는 아들 병역문제로 지지율이 급락했고 이인제 경기지사가 탈당했다. 대선 승부는 박빙이었다. 누가 봐도 표차는 100만 표 아래였다.

 그런 판에 급변사태가 터졌다. 박찬종 선대위원장이 사퇴한 것이다. 그는 이회창-이인제 후보단일화를 요구했는데 여차하면 그가 이인제 후보 쪽으로 갈 거라는 얘기가 돌았다. 박찬종은 92년 대선 때 151만 표나 얻었다. 특히 부산·경남에서 득표력이 상당했다. 박찬종 고문이 적어도 50만 표를 움직일 수 있다는 분석이 많았다.

 그를 붙들 수 있는 카드는 전국구 의원직이었다. 박 고문 측에서 “선대위원장으로서 유권자에게 비전을 설파하려면 국회에 들어가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던 것이다. 당시 박 고문은 예비후보 0순위여서 전국구 의원 한 사람만 사퇴하면 의원이 될 수 있었다. 캠프는 황우여 의원에게 사퇴를 호소하기로 했다. 황 의원은 이회창 후보의 법조 측근으로 96년 4월 ‘이회창 몫’으로 전국구 의원이 됐다. 캠프에 있던 서울대 법대 선배들이 황 의원에게 결단을 주문했다. “당신은 최측근이니 이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다른 중책을 맡을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황 의원은 거절했다. “이 후보가 직접 나에게 얘기하지 않는 한 움직일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 후보는 그러지 못했다. 성격상 측근에게 그런 부담스러운 말을 못한 것이다. 결국 박찬종은 이인제 후보의 선대위원장으로 갔다. 이회창 후보는 39만 표 차이로 졌고 보수·우파는 50년 만에 정권을 내주었다.

 국회의원이 됐다면 박찬종 고문이 탈당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선대위원장으로 부산·경남을 돌며 “이회창”을 외쳤다면 수십만 표를 모았을 것이다. 황 의원이 의원직을 고수하는 바람에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갔다. 그래서 황우여는 한나라당 지지자들에게 ‘가설(假說)적 부채’를 지고 있는 셈이다. 많은 보수·우파는 진보·좌파 10년 집권이 많은 문제를 낳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들에게 황우여는 채무자를 넘어 ‘가설적 죄인’이다.

 내년 총선까지 10개월은 보수·우파에 기로(岐路)의 세월이다. 여소야대가 되면 우파 정권은 벼랑 끝에 서게 된다. 이 긴박한 세월을 지휘하는 지도자가 황 의원이다. 당대표도 있지만 원내대표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복지·대북·예산 투쟁이 국회에서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원내대표로 뽑힌 건 긴요한 책무를 걸머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역사적 주류 세력의 지도자로서 중심을 잡아야 한다.

 그런데 그는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있다. 그는 지난 5월 20일 봉하마을에서 기자들에게 “노 전 대통령은 소탈하고 서민적이었으며 불의에 진노한 어른이었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의 지도자라면 당과 대척점에 있는 진보·좌파 지도자에 대한 평가에 신중해야 한다. 역사적 평가와 개인적 소회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개인적으로 그가 노 전 대통령을 이해하는 정서를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불의에 대한 진노’라는 건 역사적인 문제다. 노무현은 보수·우파가 중심이 된 한국의 현대사를 ‘불의가 득세한 역사’라고 규정했었다. 그렇다면 황우여의 눈은 노무현의 눈과 같단 말인가. 그리고 한나라당이 눈에 핏발을 세우며 규탄한 노무현 일가의 부정·부패는 다 어디로 갔나.

 중도(中道)의 표가 좀 필요하다고 한나라당 지도자가 역사를 함부로 훼손해선 안 된다. 황 대표는 자신이 보수·우파에 역사적 채무자임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나라가 있어 당이 있고 당이 있어 원내대표가 있는 것이다. 1년짜리 권세에 취해 당(黨)을 잊어서는 안 된다.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