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OL 타임워너가 넘어야 할 산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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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온라인(AOL) 과 타임 워너의 합병으로 ''AOL 타임 워너'' 라는 거대한 회사가 탄생한다. 이 합병이 순조롭게 마무리 된다면 새로 태어나는 회사는 장기적으로 세계의 인터넷 선도업체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휠씬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지난주 新미디어 매체뿐 아니라 舊미디어 기업의 주가도 상승했다. 머잖아 다른 기업들도 AOL 타임 워너에 질세라 곧 합병을 할 것이라는 전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터넷 산업의 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몇 가지 지역적 차이들이 흥분된 분위기에 가려 제대로 부각되지 않고 있다.

AOL은 그 차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유럽의 베르텔스만에서 중국의 China.com, 일본의 미쓰이·닛케이, 중남미의 시스네로스 그룹까지 세계의 내로라하는 기업들과 합작하고 있는 AOL은 현재 3백 20만 명의 국제 가입자를 확보하고 있다. 그런데도 AOL은 대다수 나라에서 선두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독점체제로 운영되던 막강한 전화회사들(전화 가입자들이 자동으로 인터넷 서비스 고객이 되고 있다) 과 현지 실정에 맞는 콘텐츠에 대한 소비자 수요, 그리고 AOL 자체의 경영 실책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지난해 신규업체 ''프리서브'' 가 업계 최초로 무료 인터넷 접속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AOL을 앞질렀다.

브라질에서는 지난해 11월 저명인사의 광고 공세와 함께 AOL 서비스가 개시됐지만 수백 명의 신규 가입자들에게 배포된 AOL 디스크 속엔 엉뚱하게도 삼바 그룹의 최신 곡이 들어 있었다.

지난해 유럽과 중남미·아시아는 모두 인터넷 주식 열풍으로 떠들썩했다. 그러나 미국 기업을 제외한 인터넷 업체들의 시가총액을 모두 합해도 AOL의 일부분에 불과한 상황에서 유럽과 아시아에 AOL 타임 워너 같은 규모(1천 7백 20억 달러) 에 상응하는 합병은 요원하다. 커뮤니케이션 회사로 변신중인 프랑스의 기간산업 업체 비방디에서부터 굴지의 이동전화업체 보다폰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기업들이 시장 선점을 위해 각축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주 AOL-타임 워너의 합병 발표 직후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紙를 발간하는 피어슨의 주식을 대거 매수해 주가를 15%나 끌어올린 투자가들이 전적으로 거품에 현혹된 것은 아니다. 피어슨의 최고경영자 마조리에 스커디노(AOL의 이사이기도 함) 는 "세계가 하나로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홍콩 방송사 TVB의 주식 폭등을 주도한 사람들도 투자한 보람이 있을 듯하다. 대표적인 중국어 포털 사이트인 Sina.com의 장펑녠(姜豊年) 회장은 AOL-타임 워너 합병을 계기로 "사람들이 미래를 새롭게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생각해야 할 것이 많은 사람은 바로 독일의 거대 미디어 기업인 베르텔스만의 최고경영자 토마스 미들호프다. 일찍이 인터넷에 매료된 그는 AOL 유럽 설립에 투자했다. 그에 따라 베르텔스만은 AOL에 독일과 프랑스에서 필요한 현지어 콘텐츠를 제공하는 대신 책과 음악의 새 유통망을 확보했다.

그러나 이제 AOL 유럽의 미래는 불투명하게 됐다. 미국 출판사 랜덤 하우스의 소유주이기도 한 베르텔스만이 타임 워너의 강력한 경쟁업체이기 때문이다. 뮌헨 소재 주피터 커뮤니케이션스의 분석위원 안야 스테머는 "AOL이 유럽에서 다른 콘텐츠 파트너를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베르텔스만의 콘텐츠를 타임 워너의 것으로 대체하는 것은 고객만족 차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CNN을 제외한다면 타임 워너는 유럽인들에게 제공할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AOL 유럽의 최고경영자인 안드레아스 슈미트는 "우리가 베르텔스만과 맺고 있는 돈독한 협력관계는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베르텔스만의 중역인 클라우스 아이어호프도 AOL의 합병으로 베르텔스만이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견해를 일축하며 이렇게 말했다. "베르텔스만은 5년 전부터 멀티미디어와 콘텐츠를 연계해왔다. AOL도 타임 워너와의 연계를 통해 한 단계 도약을 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시장의 합리적인 움직임이다. 이런 일에는 신속한 행동이 관건이다."

속도도 관건이지만 규모도 점차 중요해지고 있다. 베르텔스만으로서는 그것이 앞으로 고민이다. 사기업인 베르텔스만이 거대 규모의 합병에 참여하면 베르텔스만 재단이 경영권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다수 기업들은 파트너 발굴에 부심할 것으로 전망된다.

홍콩의 슈로더 투자관리社 이사인 데이비드 류는 "AOL 타임 워너의 등장으로 이제 사람들은 규모가 커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 이라며 "틈새시장 공략으로 승부하던 시절은 갔다"고 말했다.

일례로 China.com은 지난 6개월간 전자우편 서비스에서 온라인 소매업체까지 망라하는 다양한 업체들과 23건에 달하는 인수 및 합작투자 계약을 맺었다. 게다가 일본의 소프트방크와 기카리 쓰신(光通信), 홍콩의 China.com과 퍼시픽 센추리 사이버워크스, 싱가포르의 크리에이티브 테크놀로지 등 아시아 굴지의 인터넷 기업들은 중소기업 인수에 열을 올리고 있다.

홍콩의 벤처투자회사인 아시아테크 벤처스의 중역 핸슨 치아는 "1999년이 창업의 해였다면 2000년은 폐업의 해가 될 것"이라며 "거대 합병은 없을지 몰라도 경쟁력 없는 기업들을 솎아내는 작업이 이루어질 것"으로 분석했다.

유럽에서 기업인수 주도 세력은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체(ISP) 를 설립해 공모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는 전화회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 도이체 텔레콤은 올해 자사 ISP인 T-온라인의 주식을 상장할 계획이다.

스페인에서는 텔레포니카가 자사의 ISP인 테라 네트워크의 공모를 실시해 큰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세계 최대의 미디어 그룹에 꼽히는 뉴스 코프의 소유주 루퍼트 머독에게는 새로울 것도 없는 얘기다. AOL의 경쟁사인 야후! 와의 합병설이 무성한 데 대해 머독은 "구미가 당길 만한 가격에 나온 업체가 없기 때문에 합병설은 터무니 없다"고 잘라 말했다.

타임 워너의 제럴드 레빈 회장과 달리 머독은 자신을 매수자로 간주하는 듯하다. 신출내기에게 권좌를 내주기는 싫겠지만 이제는 그도 다른 미디어 업체 경영자들처럼 ''권좌 공유''에 대해 좀 더 숙고해야 할 시기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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