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여왕, 아일랜드와 역사적 화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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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영국군 학살 ‘피의 일요일’ 현장 방문 아일랜드를 국빈 방문 중인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17일(현지시간) 수도 더블린에 있는 ‘아일랜드 독립유공자 추모공원’에서 헌화한 뒤 묵념하고 있다. 이 공원은 아일랜드 독립전쟁 기간 중 영국군에 의해 숨진 이들을 기리기 위한 곳이다. 여왕의 헌화와 묵념은 영국과 아일랜드 양국 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의 표현이다. [더블린 AP=연합뉴스]


아일랜드를 국빈 방문 중인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18일(현지시간) 영국군의 민간인 학살 현장인 크로크파크 경기장을 찾았다. 영국의 역사적 과오를 솔직하게 인정함으로써 역사와의 화해를 시도한 것이라고 AP통신이 분석했다. 영국 군주의 아일랜드 방문은 조지 5세가 1911년 영국령이던 아일랜드 더블린을 찾은 이후 100년 만이다.

 여왕은 18일(현지시간) 수도 더블린에 있는 크로크파크 경기장을 찾아 희생자를 추모했다고 영국의 BBC방송이 전했다. 크로크파크 경기장은 아일랜드가 영국에 맞서 독립전쟁을 벌이던 1920년 11월 21일 더블린과 티퍼러리의 게일(아일랜드식 축구) 경기가 벌어지는 도중 영국군의 발포로 선수와 관중 14명이 숨진 곳이다. 당시 영국군은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이 영국 정보요원을 암살한 데 대한 보복으로 민간인을 상대로 총격을 가했다. 이 학살 사건은 일요일에 벌어져 아일랜드에서는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로 불린다.

 윌리엄 헤이그 영국 외무장관은 여왕의 크로크파크 경기장 방문에 대해 “우리는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여왕의 방문으로 두 나라는 앞으로 가까운 이웃으로서 정상적인 관계를 쌓아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먼 길모어 아일랜드 부총리도 “여왕의 방문은 양국의 복잡한 역사가 조금씩 풀려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BBC방송은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당시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이 한 말을 빗대 “여왕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양국 간 역사에서는 엄청난 순간”이라고 표현했다.

 여왕은 4일간의 방문 일정 중 이틀째인 이날 메리 매컬리스 아일랜드 대통령과 함께 전쟁 추모기념관도 방문했다. 추모기념관은 영국의 요구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아일랜드 군인 4만9000여 명을 기리기 위한 곳이다. 17일에는 부군 필립공과 아일랜드 독립유공자 추모공원을 찾아 헌화했다. 대다수의 아일랜드 국민들은 여왕의 방문을 환영하고 있다고 AP통신이 전했다.

 여왕의 방문 기간 동안 아일랜드 정부는 북아일랜드 독립을 주장하는 IRA 잔존 세력의 테러 가능성에 대비해 8500명 이상의 경찰을 동원해 삼엄한 경비를 펼쳤다. 아일랜드 정부의 용인으로 영국 무장경찰들도 현지에 배치됐다. 영국 여왕 방문 하루 전인 16일 밤에는 30명이 타고 있던 더블린행 버스에서 사제 폭발물이 발견돼 군당국이 해체 작업을 벌였다.

 아일랜드는 오랜 독립투쟁 끝에 1921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독립 이후에도 과거사 문제와 더불어 영연방에 속한 북아일랜드 독립 문제를 놓고 영국과 갈등을 빚어 왔다.

남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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