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경영] 제 2화 금융은 사람 장사다 (19) 미래 준비는 잘나갈 때 해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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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한국투자금융은 1980년대 초부터 은행 전환에 대비해 ‘업계 1등’이라는 명분과 실력을 쌓았다. 83년 6월 한국투자금융 창립 12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윤병철 당시 전무(왼쪽에서 둘째).


직원들의 적잖은 불평과 반발을 감수하면서 내가 혁신을 밀어붙인 데는 이유가 있었다. 머잖아 금리 자유화 시대가 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금융산업이 개편될 것이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투자금융에 몸담을 때부터 줄곧 회사 진로 문제를 고민하면서 직원들을 끊임없이 일깨웠다.

 당시엔 은행과 단자회사 사이에 칸막이가 있었다. 단자회사는 금리가 높으니까 돈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수익이 좋았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쳐놓은 칸막이는 언젠가 없어지게 돼 있다. 금리 자유화 시대가 온다면 단자회사는 어떻게 될까. 은행이나 증권회사로 전환하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하지만 금융산업 개편을 논의하던 초기엔 한국투금이 불리한 상황이었다. 은행감독원 김영상 기획국장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감독원에 출입하는 기자들 얘기를 들어보니, 한국투금은 은행이 될 수 없다고 합디다.”

 “왜 그렇소?”

 “그런 큰일을 추진하려면 당연히 로비스트가 있어야 하는데, 한국투금은 로비할 만한 대주주가 없지 않습니까? 다른 회사들은 대주주들이 난리인데, 한국투금만 손을 놓고 있는 상황 아니오.”

 당시 금융계에선 은행으로 전환하려면 청와대까지 로비를 해야 한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떠돌았다. 한국투금은 대주주가 장기신용은행인데, 장은 역시 대주주가 없는 은행이라 로비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LG(금성투자금융)와 두산(한양투자금융) 등 대기업이 소유한 단자회사와는 상황이 달랐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누가 봐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명분과 실력을 갖추게 되면 로비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역사가 가장 오래된 회사가 실적마저 가장 뛰어난 1등 회사라면, 정부로서도 우리를 제외하고 다른 회사를 먼저 은행으로 전환시키지 못할 거라고 봤다. 기회가 날 때마다 직원들에게 당부를 했다.

 “이제 곧 금융시장이 확 바뀝니다. 누구도 넘보지 못할 실력을 갖춰야 정부도 특정 업체에 특혜를 줬다는 잡음을 없애기 위해 우리를 먼저 은행으로 전환시켜줄 겁니다.”

 1985년 사장이 된 뒤부터는 해마다 연초 시무식 때 이 얘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여러 해가 가도 금융산업 개편은 일어나지 않았다. 직원들 사이에 불평이 터져나왔다. “금융시장은 아무 변동도 없고, 지금도 잘하고 있는데 사장이 괜히 우리를 겁주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독일병정’에 이어 이번엔 새로운 별명이 붙었다. ‘양치기 소년’이었다.

 그런데 89년 분위기가 달라졌다. 미국이 씨티은행의 국내 지점 23곳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 한·미 무역마찰이 심해지면서 금융시장 개방을 요구한 것이다. 국회에서 야단이 났다. 국내에서도 은행을 새로 만들지 못하고 있는데, 외국에 시장을 내주면 안 된다는 주장이 나왔다.

 당시 재무부 장관은 농업은행 동기이자 절친한 친구인 정영의씨였다. 그를 만났다. “지금쯤 금융산업을 개편해야 하지 않겠소? 솔직히 지금은 단자회사가 너무 많아 과열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걸 개편해 몇 개는 은행으로, 몇 개는 증권사로 만들어 단자시장을 줄여야 합니다.”

 정 장관은 내 말에 공감을 표시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90년 재무부가 투자금융회사의 은행 전환을 허용하는 ‘합병 및 전환에 관한 법률’을 발표했다.

 한국투자금융은 단독으로 은행 전환을 신청했다. 그런데 금융통화위원회 심사 과정에서 반대에 부닥쳤다. “은행 영업을 하려면 규모가 어느 정도 커야 하는데, 한 개 회사를 그대로 은행으로 전환하는 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금통위원들 사무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에 나섰다.

 “합병이란 남녀가 결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부부가 한 방에 든다고 무조건 훌륭한 결혼이 되는 건 아닙니다. 크든 작든 새로 은행이 돼 능력을 발휘하는 게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나의 호소에 금통위 위원들도 결국 은행 전환을 지지했다. 91년 6월 29일 재무부로부터 은행 전환 인가를 받았다. ‘합전법’에 따라 은행으로 전환한 1호 회사였다.

 당시 단자회사들이 은행 2개, 증권사 4개를 만들었다. 나머지는 계속 단자회사로 남았다. 우리가 하나은행으로 전환한 뒤에도 다른 단자회사는 잘나갔다. 한참 뒤 외환위기가 터졌고, 단자회사가 줄줄이 쓰러졌다. 이제 단자회사 중엔 금호종합금융 하나를 제외하고는 남아있는 게 없다. 그때 와서야 “우리가 전환 안 했으면 어떻게 될 뻔했느냐”는 소리가 나왔다. 지금 돌이켜봐도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다.

윤병철 전 우리금융 회장
정리=한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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