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너무’가 너무 많은 시대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18호 10면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너무 고맙고 너무 행복해요. 부모님께도 너무 감사하고, 친구들도 너무 고맙고, 응원해 주신 팬들도 너무 감사합니다. 너무 소중한 시간이었고 앞으로 너무 큰 힘이 될 것 같아요. 너무 감사합니다.”

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일요일 오후 남편은 TV를 보다가 출연자의 인터뷰에 ‘너무’가 너무 많이 나오는 걸 보고 개탄한다. “너무하잖아. ‘너무’를 빼고는 말 못 하나? 우리말에 ‘너무’ 말고도 좋은 말이 얼마나 많아. 큰일이야, 큰일.”

식탁에서 세미나를 준비하던 아내가 웃는다. “‘너무’가 뭐 어때서?”
아내의 한마디는 안 그래도 울고 싶던 남편의 뺨을 때리는 손바닥이다. 남편은 운다. “원래 ‘너무’의 사전적 의미는 ‘일정한 정도나 한계를 지나친 것’이야. 그러니까 부정적인 문맥에서 사용해야 옳단 말이지. 가령 ‘너무 졸려’ ‘너무 배고파’ ‘너무 심심해’ 같은 식으로. 그런데 너무 고맙다느니 너무 행복하다느니 이건 말이 안 된다는 거지. 더 심각한 건 우리말에 강조를 뜻하는, 다른 좋은 말이 얼마든지 있는데 오직 ‘너무’만 사용한다는 데 있어요. 아주, 매우, 대단히, 굉장히, 정말, 진짜, 참 등등 얼마나 많아.”

“사람들이 그만큼 ‘너무’를 좋아하는 거지. 부정적인 문맥에서도, 긍정적인 문맥에서도 다 사용하고 싶을 정도로. 다른 말이 아무리 많아도 사람들이 ‘너무’만 쓰겠다는데, 쓰는 사람 마음이지.”

“내 말은, ‘너무’가 국어의 생태계를 파괴한다는 거야. 당신도 황소개구리 알지? 이놈이 너무 번식력이 강하니까, 한 번에 6000마리, 4만 마리 너무 번식해 버리니까 생태계가 파괴된다잖아. ‘너무’도 마찬가지야. 번식력이 강해 다른 좋은 말들을 다 잡아먹는 거야. 결국엔 ‘너무’란 말만 남을 거야. ‘참 잘했어요’ 대신 ‘너무 잘했어요’가, ‘진짜 진짜 좋아해’ 대신 ‘너무 너무 좋아해’가 될 거라고. 말세야, 말세.”

남편은 흥분하면 항상 일정한 정도나 한계를 지나친다. 너무 간 남편을 아내가 붙든다. “그보다 사람들이 왜 ‘너무’만 너무 많이 쓰는지, 거기 어떤 마음의 작동원리가 숨어 있는지, 그런 걸 연구해 보는 게 어때요? 언어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담는 그릇이잖아. 분명 이유가 있을 거 같은데?”

“무슨 이유가 있겠어. 그냥 편하니까 쓰는 거겠지.”
“그러니까 왜 유독 ‘너무’만 편하냐는 거지. 영어에 불규칙동사라는 게 있잖아. 모든 동사를 규칙대로 하면 될 텐데 왜 불편한 불규칙동사라는 게 생겼을까? 그 마음의 메커니즘을 스티븐 핑커란 사람이 연구해 『단어와 규칙』이란 책으로 냈다고 하잖아요.”
아내의 말은 세미나 발표처럼 이어진다.

“방송에서 사람들이 한 말을 자막으로 옮기면서 ‘너무’를 ‘정말’이나 ‘아주’ 등으로 함부로 바꾸던데 말한 사람을 깔보는 오만이고 독재죠. 그런 거야말로 우리말의 생태계를 교란하는 황소개구리 같은 거 아닐까. 설마 당신 이젠 정부가 나서서 ‘너무금지령’을 내린다든지 최소한 ‘너무종량제’라도 시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생각을 들킨 남편은 황소개구리 눈을 하고 아내를 바라본다.
“너무하네. 사람을 어떻게 보고.”


김상득씨는 부부의 일상을 소재로 『아내를 탐하다』를 썼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