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受命之日 寢不安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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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한 중인 츠하오톈(遲浩田.71)
중국 국방부장(장관)
은 중국 인민해방군사의 '살아있는 전설' 이다.
산둥(山東)
성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15세 때인 1944년 팔로군에 입대, 항일투쟁.국공(國共)
내전에 뛰어들었다.
1949년 국민당군과의 상하이(上海)
전투에서는 중대장으로 큰 공을 세워 '3급 인민영웅' 칭호를 받았다.
한국전쟁 때를 포함해 굵직한 전투를 1백여회 치르면서 7차례나 중상을 입었으나 그때마다 "예편해 편한 직무에 종사하라" 는 권유를 거절하고 매번 목발을 짚고서라도 부대에 다시 나타날 정도로 군인을 천직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어린 시절 그의 우상은 12세기 남송(南宋)
의 장군 악비(岳飛)
나 청나라 말기 정치인으로 아편 밀수를 근절하려다 아편전쟁까지 유발한 임칙서(林則徐)
같은 중국역사상 민족주의자.애국자들이었다고 한다.
츠하오톈은 공교롭게도 1950년 11월 19일 인민해방군 제27군 예하 부대대장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함으로써 우리와도 인연을 쌓기 시작했다.

중국측 기록에 따르면 미 해병 1사단.보병 7사단 등과 전투를 벌이던 그는 1950년 11월 30일 함흥.강계지역 전투에서 미 보병 7사단의 2개 연대와 맞붙어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미 7사단 32연대는 병력 1천53명 중 겨우 1백81명만 생환했을 정도로 부대가 결딴났다.

'미군 연대병력을 괴멸시킨 유일한 전투' 로 중국측 전사(戰史)
는 기록하고 있다.
1951년 5월에는 강원도 홍천.인제 전선에서 한국군 5사단과 미 공수부대의 협공에 말려들었으나 교묘한 전술로 휘하 부대원을 무사히 탈출시킨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1952년 9월 그가 중국에 복귀하게 되자 북한측이 '3급 국기훈장' 을 수여해 '은혜' 를 기릴 정도였다.

이후 해방군보.인민일보 간부를 거쳐 1993년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大)
에서 98.8%의 최고 찬성률로 국무위원에 선임됐다.
지금은 중앙군사위 부주석으로 장완녠(張萬年)
부주석과 함께 중국 군부의 2인자로 꼽히는 실력자다.

역사가 흘러 6.25때 우리와 혈투(血鬪)
를 벌였던 츠하오톈은 남북한 통틀어 한반도를 처음 공식방문하는 중국 국방책임자가 됐다.

일개 사병에서 군 최고위직에 오른 그는 중책에 임명될 때마다 제갈량(諸葛亮)
의 말을 인용해 "명을 받은 날은 잠자리가 편치 않고 음식맛도 느끼지 못하겠다(受命之日 寢不安席 食不甘味)
" 라고 되뇌는 습관이 있다고 한다.
요즘 한국에서 고위직에 임명되는 이들도 이런 자세로 임하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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