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것, 복잡한 것에 대한 미련을 버려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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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호 02면

“기존 생각은 깨뜨려라,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하라”
지난 4월 밀라노 가구 박람회(i saloni)를 찾았을 때 가장 먼저 간 곳은 카르텔의 부스였다. 디자이너 스탁이 오랫동안 자신의 아이디어를 제품으로 선보이고 있는 가구회사다. 그는 이곳에서 올해의 신제품을 선보일 예정이었다. 이미 각국에서 모인 기자들로 자리는 만원. 어느새 그가 트레이드 마크 같은 끈 없는 운동화에 주황색 가죽장갑을 낀 차림으로 한 무리의 군중과 함께 나타났다. 그는 올해 의자와 탁자 등 세 개의 신제품을 선보였다. 최소한의 디자인을 추구하는 그의 디자인 철학은 여전했다. 그는 ‘미스 레스(Miss Less)’라는 의자에 대해 “일종의 깨부숨”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디자인을 디자인하는 디자이너, 필립 스탁

“나는 이 의자에 정치적인 의미를 담아 디자인했다. ‘미스 레스’보다 레스(더 간단)하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난 벽에 디자인을 집어넣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고 싶었다. 왜냐하면 이보다 더 적은 디자인, 더 적은 재료, 더 적은 긴장감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존의 생각을 깨뜨려야 하고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해야 하는데 어쩌면 이것이 작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는 두 번째로 테이블 ‘킹 톱(King Top)’을 가리키며 “오늘날 제품으로 생산하기 불가능한 덩치 큰 제품을 어떻게 한 덩어리로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제품은 매우 한정적이고 매우 비싸지만 우리는 한번 더 플라스틱으로 대중적인 디자인으로 만들어 냈다. 이것은 일종의 나노 레볼루션(Nano Revolution)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뒤에 있는 높은 의자(원모어 원모어 플리즈)에 대해서는 기존 제품인 고스트 컬렉션의 연장으로 서비스 차원에서 만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디자이너에게 중요한 것을 묻는 질문에 “제작자와의 관계”라고 말했다. 회사와의 장기적인 파트너십 협력관계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한번 쓰고 버리는 크리넥스 티슈 같은 사회가 아니다. 멋진 드레스를 한 번 입고 버리지 않고 의자를 한 번 쓰고 버리지 않듯, 디자이너에게 제작자는 한 번 쓰고 버리는 관계가 돼서는 안 된다. 내 경우 50년 이상의 전통을 가진 카르텔은 플라스틱에 철학을 담고 있는 회사다. 그들의 능력은 내 아이디어를 좋은 품질의 제품으로 만들고 많은 사람이 소유할 수 있게 해준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왜 만드는지 알고 있다.”

“디자인이 마케팅 수단이 돼서는 안 된다”
스탁이 생각하는 좋은 디자인은 좀 다르다. 그는 어떤 물건을 다른 것보다 단지 더 예쁘게만 만들었다면 쓸모 없는 것이라고 여긴다. 디자인이 제품을 더 많이 팔게 하는 마케팅의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디자인이 각광받기 시작한 60년대 이후 만들어진 물건들과 소비자는 좋은 관계를 맺기가 힘들다. 요즘 사람들은 물건을 살 때 버릴 생각부터 한다. 이것은 소비의 속도가 아니라 제품의 수명을 의미한다.”

복잡한 것도 마찬가지다. 스탁은 많은 제품이 터무니없이 복잡하다고 말한다. 그는 “회사나 디자이너들이 물건을 복잡하게 만드는 이유는 간단하게 만드는 것이 복잡하게 만드는 것보다 열 배는 더 어렵기 때문”이라며 “만드는 사람들이 자기가 얼마나 똑똑한지 보여주기 위해 복잡하게 만든다”고 일갈한다. 그에게 현대적이란 말은 최소한이라는 말과 같다. 장치가 많은 것들은 아무리 잘 만들었다 해도 구식이라는 것이다. 여성용 제품이 다 곡선적이고 핑크색인 것도 반대한다. “제작자들은 여성들의 지성이 얼마나 깊고 풍부한지를 이해해야 한다”면서.

그는 시대를 초월하는(Timeless) 것이 모던 디자인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대를 물려 쓸 수 있는 가치를 담고 있는 것이다. 스탁은 자신이 디자인한 라 시에(La Cie)의 하드 디스크를 예로 들며 “좋은 제품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으로, 제품을 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학생들에게는 “디자인을 생각하지 않으면 디자인을 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자신의 삶을 생각하고, 사람을 생각하고, 땀을 흘릴 때 좋은 디자인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올바른 품질, 올바른 디자인, 올바른 가격으로 소비자의 생활을 나아지게 한다면 그것이 바로 ‘선물’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한때 “매우 아름다운, 많은 필요 없는 것들을 만드느라 평생을 보냈다”고 자책한 적이 있다. 2006년 디자인 잡지 ‘아이콘’을 통해 “나는 엘리트주의가 그랬듯 지난 20년 동안 민주주의 디자인을 통해 디자인을 살해했다”고 털어놓았다. 2008년 독일 주간지 ‘디 차이트’와의 인터뷰에서는 “2년 안에 디자인을 그만두겠다”고 한 적도 있다.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느끼거나 흥미를 갖기를 그만두었고 단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2008년 TED 강연에서는 “전쟁이 거의 없던 80년대 ‘빛의 시기’에는 나 같은 사람들이 받아들여지고 예술에 대해 얘기했지만 지금과 같은 어두움과 혼돈의 미개 사회에서는 (예술보다) 더 급한 것을 위해 일을 해야 하고 그런 면에서 내가 하는 일이 창피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는 어떤 면에서 디자인 과잉 사회에 대한 하나의 반성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디자인을 그만두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나아진 느낌이다. 최근 그는 “우리 앞에 살았던 수많은 선조가 일하고 창조했기 때문에 우리가 현재의 문명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우리도 후세를 위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의무가 있다”고 들려주었다. 자신이 디자인한 세상의 모든 보잘것없는 것들을 다시 자랑스러워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리라.

필립 스탁
1949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필립 파트리크 스탁(Philippe Patrick Starck). 비행기 엔지니어인 아버지 영향을 많이 받았다. 파리의 에콜 니생 드 카몽도(cole Nissim de Camondo)에서 공부했다. 이탈리아 출신의 친구 아르투로 델 푼타 크리스티아니 덕분에 드리아데(Driade), 카르텔(Kartell), 플로스(Flos) 등 이탈리아 회사들과 깊은 파트너십을 맺고 일하고 있다. 각종 생활용품부터 산업용품까지 전방위적인 분야에서 디자인 역량을 펼쳐 보였다. 거미같이 생긴 레몬즙짜개 ‘주시 살리프’ 등이 대표작. 프랑스 필라 쉬르 메르의 라 코르니체 호텔 레스토랑, 파리의 로열 몽소 호텔, 뉴욕 로열턴 호텔 등 수많은 명소의 인테리어를 맡았다.


김성희씨는 밀라노를 무대로 활약 중인 보석디자이너다. 유럽을 돌며 각종 공연과 전시를 보는 게 취미이자 특기.sunghee@stella- 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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