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무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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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호 33면

오사마 빈 라덴은 작은 무덤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파키스탄에 숨어 살던 그를 찾아내 2일(현지시간) 사살한 미군은 유해를 아라비아해에 수장했다.

채인택의 미시 세계사

역사상 적의 무덤을 허용하지 않는 경우는 부지기수다. 묘지가 자칫 추종자들이 집결해 재기와 명예회복, 심지어 보복까지 다짐하는 성지(聖地)가 될 걸 우려해서다. 미국은 1948년 11월 12일 도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전 총리 등 태평양전쟁 A급 전범 7명을 그렇게 대했다. 같은 해 12월 23일 0시1분 도쿄의 스가모 형무소에서 교수형 집행 뒤 해가 뜨기도 전에 요코하마 화장터에서 화장했다. 유골을 분쇄해 재와 함께 비행기에 실어 태평양에 날려보냈다.

공산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러시아 혁명으로 로마노프 왕조를 무너뜨린 볼셰비키는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와 가족들을 총살(1918년)한 뒤 시신을 철저히 숨겼다. 일가의 시신을 염산으로 반쯤 태운 뒤 폐광에 묻어뒀다가 나중에 숲에 아무런 표지도 없이 다시 묻었다. 74년 에티오피아에서 군부 쿠데타를 일으킨 공산 세력도 마지막 황제였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이듬해 숨지자(피살설도 있다) 시신을 황궁 화장실에 버렸다.

하지만 이런 노력도 소용없을 때가 있다. 일본의 경우 전범들을 처형하자마자 군국주의자들의 역습이 시작됐다. 바로 그날 밤 몇몇 남자가 심야의 화장터에 접근했다. 전범의 변호사 한 명과 화장터 근처에 있던 절의 주지였다. 이들은 화장터 직원의 안내로 현장에 남은 7명의 남은 재와 뼛조각 일부를 긁어모았다. 인근 절에서 몰래 보관하던 재와 뼛조각은 60년 아이치현 산가네산 꼭대기에 묻혔다. 지금은 ‘순국 칠사묘’라는 이름의 기념 묘소가 되어 있다. 전범들에게 ‘순국한 선비’란 가당찮은 어휘를 사용한 이곳은 야스쿠니 신사와 함께 군국주의자들의 성지가 되어 있다.

러시아에선 공산체제가 몰락한 뒤에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유골이 수습됐다. 이들은 98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교회에 안장됐다. 2001년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 정교의 성인으로 시성됐다. 에티오피아에선 92년 셀라시에 황제의 유골이 화장실에서 발견됐으며, 2000년 에티오피아 정교식으로 장례식을 성대히 치르고 수도인 아디스아바바의 대성당에 묻혔다.

물론 흔적을 영영 찾을 수 없게 해 성역화를 막은 경우도 있다. 67년 볼리비아에서 잡혀 처형당한 공산혁명가 체 게바라의 시신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그의 죽음을 증명하기 위해 시신 사진을 공개했다. 하지만 유해는 아무런 표지도 없는 곳에 묻어버렸다. 그 결과 아무도 무덤 위치를 모른다. 체 게바라의 흔적을 찾을 방법은 현재로선 없다.

유대인을 학살한 아돌프 히틀러도 마찬가지다. 독일 정부는 무덤을 허용치 않음은 물론 바이에른의 알프스 기슭에 있던 거처인 베르크호프마저 50년대 초반 흔적도 없이 허물어 버렸다. 야만적인 비극이 재발되지 않게 하려면 무력보다 이러한 세심한 민사 업무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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