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나간 남편, 집 지킨 아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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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호 10면

나는 찜질방을 좋아하지 않는다. 멋도 개성도 없는 찜질복을 똑같이 입고는 덥고 건조하고 시끄러운 공간에 앉아있으면 어쩐지 울적해진다. 그런데도 지금 찜질방에 있는 것은 달리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내게도 집은 있다. 그러나 전기, 수도, 가스, 인터넷 등이 들어오지 않는 집이란 도무지 쉴 곳이 못 된다.

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간밤엔 봄비가 여름 장마처럼 쏟아졌다. 번개와 천둥도 쳤다. 나는 그런 날 밤엔 잠을 설친다. 내 잠은 빛과 소리에 민감해 빗소리가 요란해도, 번개가 번쩍거려도 어디론가 달아나버린다. 반면 아내의 잠은 튼튼하다. 지난여름 가로수를 뽑아버리고 아파트 베란다 유리를 다 깨고 심지어 창틀을 뜯어 날려버린 태풍 곤파스도 아내의 잠은 전혀 건드리지 못했다. 그러니 이 정도 폭우 따위에 아내의 잠은 꿈쩍도 안 하는 것이다. 한숨도 못 잔 나는 태평하게 잠든 아내를 시기심 가득한 눈으로 본다.

일을 낼 것처럼 천둥과 번개가 요란하더니 결국 새벽 5시쯤 정전이 되었다. 아까부터 아내를 흔들어 깨우고 싶던 나는 좋은 명분을 얻는다. “좀 일어나 봐. 전기도 난방도 다 꺼졌어. 물도 안 나오고.” 눈 뜬 아내는 내 말을 듣고도 별일 아니라는 듯 도로 잠 속으로 들어간다.

집 안이 온통 깜깜하다. 인터넷도 TV도 볼 수 없다. 샤워는 물론 세수도 할 수 없다. 모닝 커피를 내려 마실 수도 없고 화장실도 사용할 수 없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된 기분이다. 27층에서 계단을 걸어 내려오면서 나는 하루아침에 인생을 망쳐버린 남자로 전락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샤워를 못 해서인지 하루 종일 몸이 가렵고 냄새가 나는 것 같다. 퇴근해서 아파트에 왔는데 아직 복구가 되지 않았다. 27층까지 걸어서 오른다. 평소 운동하지 않던 허파는 터질 것 같고 허벅지는 후들거린다. 아내는 외출 중이라 집에 없다.

전기와 수도와 가스와 인터넷이 없는 집에서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 나는 집을 나와 찜질방으로 간다. 무엇보다 가렵고 냄새 나는 몸을 좀 씻을 수 있으니까. 간밤에 설친 잠도 잘 수 있을 테니까. 샤워를 한 다음 멋도 개성도 없는 찜질복으로 갈아입고 나는 덥고 건조하고 시끄럽고 밝은 곳에 누워 잠을 청한다.

기다렸다는 듯이 아내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온다. “어디야?” “찜질방. 밤 12시 복구 예정이라지만 언제 될지 모른대. 여기로 와.” “그래도 집이 낫지. 난 집으로 갈 거야. 당신은 거기서 자고 오든지.” 나는 알 수 없다. 도대체 아내는 27층까지 계단을 걸어 불도 들어오지 않는 깜깜한 집에 가서 무엇을 하겠다는 건지. 두 시간 후 아내에게서 또 문자가 온다. “집에 전기 들어왔어. 어서 와.” 역시 내 쉴 곳은 집이다. 나는 집으로 달려간다. 아내 말처럼 정말 전기가 들어와 아파트 집집마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이제 본연의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다만 아직 승강기는 작동되지 않았다. 27층까지 계단을 걸어올라 집 앞에서 가쁜 숨을 고르다 문득 나는 알 것 같았다. 깜깜한 집에 먼저 가서 아내가 하려고 했던 게 무엇이었는지. 전기, 수도가 안 들어온다고 집을 버리고 찜질방으로 달아난 남편에게 문자를 보내는 일이 아니었을까.


김상득씨는 부부의 일상을 소재로 『아내를 탐하다』를 썼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에서 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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