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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값 급락 … ‘헌트 형제의 악몽’ 재현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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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1면

2일 은값이 급락했다. 일각에선 글로벌 상품시장의 거품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이란 지적도 나온다. 사진은 시카고상품거래소(CME) 모습이다. [중앙포토]<사진크게보기>


비상하던 은(銀)값이 급락했다.

 2일 오후 4시 현재 싱가포르 등 아시아 지역 상품거래소에서는 은 현물 값이 온스(31.1g)당 44.46달러 거래됐다. 이는 직전 거래일보다 7% 넘게 떨어진 값이다. 또 5월 11일에 인도되는 은 선물 값은 8% 이상 떨어진 온스당 44.6달러에 거래됐다. 거래일 기준 이틀 연속 하락이다.

 블룸버그통신은 “미국 시카고상업거래소(CME)가 지난달 29일 장 마감 이후부터 은 마진론의 담보 비율을 낮춰 적용한 게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이날 보도했다. 헤지펀드와 은상장지수펀드(ETC) 등이 은을 증권사 등에 담보로 맡기고 빌릴 수 있는 돈이 줄어든 것이다. 이전처럼 헤지펀드 등이 공격적으로 은을 사들이기 어려워졌다.

은값 하락을 경고한 중앙일보 4월 12일자 E4면.

 마진론의 담보비율 인하는 은값 폭락의 기억을 되살렸다. 1980년 1월 뉴욕상업거래소(NYMEX)는 은값이 급등하자 은 담보비율을 낮췄다. 당시 글로벌 차원에서 은을 매집하던 넬슨 헌트와 윌리엄 헌트 형제는 직격탄을 맞았다. 둘은 은을 담보로 맡기고 빌린 돈으로 다시 은을 사들이며 값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마진론 담보비율 인하 여파로 은값은 폭락했다. 80년 1월 18일 온스당 49.45달러로 사상 최고치에 이른 뒤 떨어져 그해 연말엔 20달러 아래로 곤두박질했다.

 이미 은 시장엔 단기 급등에 따른 피로가 누적된 상황이었다. 은값은 올 들어서만 50% 넘게 뛰었다. 금값은 10% 남짓 올랐을 뿐이다. 단기에 급등해 수익을 현금화하려는 세력들이 늘어났다. 블룸버그는 “헤지펀드 등이 지난달 26일까지 1주일 새에 은 매수 포지션을 26%나 줄였다”고 전했다. 은 시장의 선수(큰손)들이 발을 빼기 시작한 셈이다.

 큰 손들의 현금화는 최근 다른 상품시장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설탕값은 2월 초 사상 최고치에 이른 뒤 미끄러져 지난달 29일까지 34% 추락했다. 면화 값은 3월 초 사상 최고치에 이른 뒤 17% 정도 떨어졌다. 구리 값은 올 초 이후 6% 정도 하락했다.

 미 상품시장 애널리스트인 브래드 지글러는 월스트리트 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전반적으로 상품시장은 과매수 상태”라며 “급등한 자산은 급락하기 십상이란 점을 투자자들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은값을 상품가격 추락의 전조로 보기도 한다. 유명한 투자전략가인 고(故) 피터 번스타인은 “은이란 상품은 값이 뛰기 시작하면 전형적인 버블 궤적을 밟는다”며 “은값은 (금이나 곡물, 원유보다) 뒤늦게 급등했다가 가장 빠르게 추락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실제로 80년 1월에도 은값이 최고치에서 추락하기 시작한 지 사흘 만에 금값이 곤두박질했다.

 반론도 만만찮다. 현재 초유의 유동성 풍년이 이어지고 있고 중국이란 자원 블랙홀이 존재하는 한 금과 은, 원유 값은 계속 오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전문가가 적지 않다.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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