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전청와대 법무비서관 박주선의 야망과 좌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끝내 일이 터졌다. 지난해 12월16일 저녁.

朴柱宣 전 청와대 법무비서관 구속 문제를 놓고 대검 중수부 수사팀과 검찰 수뇌부는 대충돌을 일으켰다. 李種旺 수사기획관은 저녁 7시 기자 브리핑에서 이례적으로 박 전 비서관의 혐의 사실을 미리 설명하고 18일 오전 10시 재소환, 구속영장 청구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소환 사실을 미리 공개해 역풍을 막겠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박씨 처리 문제가 내연하던 검찰 내부의 갈등을 폭발시키며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순간이었다.

기자는 12월10일, 12월14일 두차례 박 전 비서관과 만났다. ‘엘리트 검사 박주선’의 야망과 좌절의 드라마를 다루자는 취지였다. 박씨는 ‘옷로비 사건 자체’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설명을 충분히 듣고 인터뷰를 허락했다.

그는 검찰 수사팀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조심스런 태도였다. 인터뷰 중간 중간에 옷 로비 사건에 관한 대화가 튀어나오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는 “사직동팀으로부터 최초 보고서를 보고받지 않았으며, 사건의 축소 은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확신을 갖고 얘기했다. <편집자>

■ 움막에서 태어난 가난한 수재의 꿈
■ 가족에 대한 부담으로 3修 끝에 서울대 법대 합격
■ 5·6공, 문민 시절에도 인정받았던 强骨
■ 김태정에 등떼밀려 맡았던 법무비서관 자리
■ DJ가 ‘박수석’이라고 불렀던 영광은 가고…
■ “명예를 먹고사는 나는 이제 죽어버린 것”

“풀려나기는 했지만 나는 이제 죽어버렸다”

지난해 12월5일 새벽 3시. 박주선 전 청와대 법무비서관은 36시간 동안 이어진 대검 조사를 받고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다. 현직 검사(박씨는 현재 법무부 법무연수원에 소속돼 있다)
의 신분으로 검찰에 불려가 동료들의 손에서 죽었다가 살아났지만, 그는 자신을 가리켜 굳이 “죽어버렸다”고 표현했다. 그의 어법을 빌리자면 12월3일 함께 소환되어 그 다음날 전격 구속된 김태정 전 검찰총장은 당연히 ‘죽은 목숨’으로 분류될 터이다.

엘리트 검사 박주선은 스스로의 표현대로 정말 죽어버린 것일까?

그보다 먼저 왜 수사가 진행되는 시점에 자신에게 굳이 자학에 가까운 표현을 쓴 것일까?

검사는 명예를 먹고 사는 직업이다. 호남 출신으로서 검찰 동기(사시 16회)
중에서도 줄곧 선두를 달려온 박씨는, 현 정권 직전까지 영남세가 득세해온 검찰 조직 안에서 몸가짐에 각별히 신경을 쓰는 스타일이었다. 더구나 초임 검사 시절부터 그는 ‘정직’을 생활신조로 삼아왔다. 그런데 지금 그는 명예를 잃었고 정직하지 못한 사람으로 ‘찍혀’ 있다. 치욕스런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과 펑펑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에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이 툭 튀어나온 것이다.

― 그때 왜 그런 표현을 썼는가?

“그런 말을 했는지 기억은 없는데 나중에 신문 보니까 그렇게 나왔다. 온갖 불명예스런 수식어가 내 이름 앞에 붙어다니고 있다. 그러니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 아닌가?”

가혹한 운명을 원망할 겨를도 없는 모양이다. 대답에 생기가 없다. 아닌 게 아니라 그것이 지금 박주선 전 법무비서관이 처한 현실일지도 모른다. 이제 그에게는 바람막이 권력도 없고 따뜻한 여론의 눈길도 사라졌다. 오직 혼자서 이 난관을 돌파해야 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김대중 대통령의 총애를 듬뿍 받고 있었다. 박주선 법무비서관에 대한 대통령의 신임은 대단했다. 기자는 오래 전부터 여권 핵심 인사들로부터 ‘박비서관은 청와대에서도 대통령을 수시로 독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라는 얘기를 숱하게 들어왔다. 실제로 DJ는 박비서관을 부를 때 옆에 다른 수석들이 있어도 꼭 ‘박수석’이라고 호칭한다.

DJ식 신뢰감의 표현이다.

최병모 특검팀의 수사가 탄력을 받고, 그런 와중에 박시언씨가 최종보고서를 공개한 뒤 박비서관은 곧바로 사표를 냈다. 그러나 처음에 DJ는 사표를 반려했다. 두번째로 사표를 낸 뒤에야 DJ는 “박비서관이 그럴 사람이 아닌데…”라며 아쉬워했다고 전한다.

― 가까이서 본 대통령은 어떤 분이었는가? 사임하고 나서 연락은 있었나?

“지금은 어른이 연락을 주셔도 안되고 내가 감히 연락하지도 못한다. 정말로 정이 많은 분이다. 참 정이 많은 분이지. 나는 법무비서관에 임명되고 나서야 대통령을 처음 만났다. 그 전까지 내가 언론을 통해 알았던 것을 훨씬 뛰어넘는 분이다. 정말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지금은 누를 끼치고 떠나게 되었지만 옆에서 모셨다는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간직하고 있다.”

정말 그에게 1년9개월간의 청와대 생활은 무한히 영광스러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은 한꺼번에 찾아온다고 했던가.

가난한 시골 소년이 정점을 향해 차근차근 밟아온 노력과 시간에 비하면 그의 몰락은 허무할 정도로 순식간에 일어났다. 어제까지 손아귀에 잡힐 것 같았던 검사로서의 꿈과 권력을 지탱한다는 자부심이 그야말로 물거품처럼 무너져내렸다.

그렇다면 정말 ‘검사 박주선’은 죽어버린 것일까?

― 이제 검사 생활의 끝이라고 보는가?

“이후 내 삶의 모든 것은 일단 사직동팀으로부터 최초 보고서를 전달받았다는 의혹에서 벗어나는 데서 출발한다. 명예회복도 그 다음 일이다.”

그때까지는 ‘시한부’ 죽은 목숨이라는 설명이다.

“누를 끼쳤지만 대통령 모신 것은 무한한 영광”

기자가 박 전 비서관을 만난 것은 공교롭게도 12월12일 대검 2차 소환을 전후한 두차례 시점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농촌의 아들로 태어나 권력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올라갔던 이 입지전적 인물의 드라마틱한 생애를 취재해 보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만남 자체도 게릴라전 치르듯 이뤄진 데다 한편으로는 망연자실해 있고 한편으로는 울분을 삭이고 있는 사람을 상대로 ‘취재하듯’ 질문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못할 짓이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고백하자면 이건 인터뷰가 아니고 숫제 위로의 자리였다. 이럴 때는 기자가 된 것이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어쨌든 ‘인간 박주선’과 ‘검사 박주선’을 알기 위해 이곳저곳 수소문하고 자료를 찾아보니 그의 인생은 단순히 드라마틱하다고 단정짓기 곤란한 여러 면모가 뒤섞여 있었다.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단아함을 잃지 않았고, 마당발로서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면서도 공사 구분이 분명한 편이며, 피의자를 인간적으로 대하지만 사건을 처리하는 데는 냉정한 편이고, 담백한 성품을 보이면서도 때로는 가슴 한켠에 담아둔 응어리를 속절없이 노출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처럼 여러 모습 중에서도 그의 첫번째 항목을 고르라면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점을 꼽아야 할 것 같다.

먼저 박씨의 광주고 동기 김홍윤(金洪允·대신생명 관리본부장)
씨가 전해 주는 가슴저린 이야기를 들어보자.

“동생이 취학 전이었다고 하니까 박주선이 초등학교 1학년인가 2학년인가 할 때였다고 합니다. 짧은 겨울해는 벌써 저버리고 어두컴컴한 기차역에서 동생이랑 둘이 덜덜 떨면서 장에 나가신 어머니를 기다렸던 모양입니다. 동생은 엄마가 왜 오지 않느냐고 울고불고, 주선이는 언제 올지 알지도 못하면서 곧 나타나실 거라고 동생을 달래다 자기도 울어버렸다고 해요. 언젠가 이런 기억을 털어놓으면서 눈물을 주르륵 쏟아냅디다.”

소년 박주선은 말 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다.

박주선은 49년 7월23일(음력)
전남 보성군 옥평리 156번지에서 출생했다. 보성읍에서 5∼6㎞ 떨어진 냇가 주막과 붙은 토담집이었다. 말이 토담집이지 사실상 진흙을 이겨 지은 움막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방바닥은 장판이 아니고 비료포대지로 몇 겹을 바른 상태였다. 방학 때면 공부 잘하는 학생 박주선과 어울려 다니면서 아무 집에서나 잠을 잤던 친구들에 따르면, 중학생 시절 박주선은 스스럼없이 친구들을 불러들여 함께 놀다가 쓰러져 잠을 자곤 했는데 이 토담집에서는 겨울철에도 얇은 홑이불밖에 없어서 추위로 잠을 설쳐야 했다고 한다.

움막같은 토담집서 가난을 이겨내야 했던 수재 소년

추운 겨울밤 기차역에서 동생을 부둥켜안고 오지 않는 어머니(위정남)
를 기다려야 했던 이유는 물론 궁핍한 경제 때문이었다. 당시 박주선의 집안은 아버지(박정순)
가 변변한 일을 못하는 처지여서 어머니가 사실상 가장 노릇을 해야 했다. 어머니는 시골을 돌아다니며 계란과 쌀을 사서 광주에 내다파는 일로 두 아들의 학비를 대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박씨가 검사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게 된 것도 이런 환경에서 빚어진 작은 사건 때문이었다.

매일 보성과 광주를 오가야 했던 박씨의 어머니는 기차 삯을 아끼기 위해 무임승차를 하고 다녔다. 더러는 역무원들에게 무임승차를 들켜 유일한 생계수단인 계란과 쌀을 압수당하기도 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역시 무임승차하다 들켜 곤경에 처해 있는데, 열차 차장이 다가와서는 난감해하는 어머니를 풀어 주고 차비도 건네 주며 열심히 살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이 광경을 지켜본 소년 박주선은 ‘나도 커서 힘있는 검사가 되어 불쌍한 사람들 돕겠다’고 결심했다는 것이다. 그 시절 가난한 수재 소년들의 전형적인 입지(立志)
, 바로 그것이었다.

박주선은 보성남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보성중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했다. 초등학생 당시 그의 집에서 학교까지는 왕복 12㎞의 거리였는데, 등하교에만 족히 두시간 이상은 잡아먹었을 거리를 매일 걷거나 뛴 덕에 요즘도 박씨의 체력은 아주 강건한 편이다.

박주선은 65년 대도시 광주로 진학했다. 광주고에서도 그는 줄곧 수석의 자리를 놓지 않았다. 당연히 법대반에 속했는데 지금도 박씨의 가슴에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 ‘동생 문제’였다. 박씨 집안의 경제력으로는 중학생이던 동생과 서울대 법대를 지망하는 박주선을 모두 대학에 보낼 형편이 아니었다.

어느 날 “너도 공부해야 산다”는 박주선과 “공부를 잘하는 형만 대학에 가는 것이 옳다”는 동생이 심하게 언쟁을 했고, 결국 광주고를 수석으로 졸업한 박주선이 대학에 진학하는 것으로 집안 의견이 결정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무엇이든 한번 듣기만 하면 잊지 않는 박씨가 대학 입시에서 두번이나 낙방한 일이었다. 보성중학 시절부터 ‘3총사’로 어울려 다녔던 이용철(李容哲 ·중앙대 의과대학 진단방사선과 교수)
박사는 “어머니와 동생에 대한 부담 때문에 실력발휘를 못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다음은 당사자인 박씨의 설명인데,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아래에 옮긴다.

“Do 동사의 과거분사형 ‘done’이라는 단어 있잖아요. 그게 30점짜리인가 굉장히 중요한 해석 문제였는데 시험장에서 도대체 이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해석을 제대로 못하고 바깥에 나와 친구들하고 담임 선생님한테 ‘done’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어요. 다들 깔깔깔 웃고 난리였어요. 두번째는 수학 문제를 푸는데 아무 의미도 없는 대괄호를 가우스기호로 오해해서 고민고민하다 풀지 못했어요. 그때 같이 시험을 치른 김광호(金光魯·현 대구지검 특수부장)
한테 ‘너 가우스기호 풀었냐’고 물어보니까 ‘가우스기호가 무슨 얘기냐’고 그러는 겁니다. 우리 어머니가 점을 봤는데 안된다고 나왔다는 거예요. 정말 안된다는 점괘가 맞기는 맞는 모양인지….”

친구 이박사의 분석대로 부담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박주선은 3수 끝에 70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식구들은 박주선의 뒷바라지를 위해 모두 서울로 이사했다. 어머니는 낮에는 건물 청소를 하고 저녁에는 직장인들 밥을 해주며 학비를 댔다. 동생은 신문배달을 해서 집안 생활비를 벌었다. 실로 눈물나는 희생이었다. 이박사에 따르면 2년 전 동생이 관상동맥 협착으로 큰 수술을 받게 됐을 때, 박주선은 중학교만 졸업한 후 세상을 몸으로 때우며 고생하다 이런 병에 걸렸다고 대성통곡했다. 문병갔던 친구들도 함께 울었다.

고생하는 어머니와 동생에게 서울대 법대 입학이라는 ‘선물’을 안겨준 후 비로소 부담감을 벗었기 때문일까. 이 때부터 정점을 향한 박주선의 쾌속 질주는 막힘이 없었다. 대학 4년생이던 74년 그는 사법시험(16회)
에 당당히 수석 합격했다. 그리고 5년간의 사법연수원 및 법무관 생활을 보내고 79년 서울지검으로 발령받았다.

74년 사법고시 수석합격, 서울지검 특수부에서 발탁

1년3개월간 공판부와 형사부를 거쳤더니 특수부에서 그를 발탁했다. 검찰의 꽃인 특수부의 경우 지원보다 발탁으로 충원하는 게 관례다. 그만큼 특수부는 지원자가 많았다. 특히 대한민국 전체를 커버하는 서울지검 특수부의 경우 초임 검사가 발령받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초임 검사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박검사의 발령 문제를 놓고 형사부와 특수부 사이에서 승강이가 벌어졌다. 형사부에서는 ‘당장은 못내놓겠다’는 것이었고, 특수부는 ‘하루라도 빨리 데려다 써야겠다’는 입장이었다.

이걸 조정한 사람이 나중에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을 지낸 김석휘(金錫輝)
당시 서울지검장이었다. 박검사와 김석휘 지검장의 인연은 감싸주고 존경하는 선후배 사이로 이어진다.

박씨는 검찰 선배 중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는 질문에 주저없이 ‘김석휘 변호사’를 꼽았다. 그런데 답변에 최근 사직동 보고서 파동과 관련해 가슴에 쌓인 감정이 담겨나왔다.

“김태정 선배가 나를 아껴준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 분이 아껴주는 것과 내가 존경하는 것은 다르다. 가장 존경하는 선배를 꼽으라면 김석휘 변호사를 얘기할 수밖에 없다. 내가 김태정 장관과 선후배 사이라고 해서, 그리고 김선배가 나를 법무비서관에 추천했다고 해서, 최종 보고서를 건넨 것처럼 최초 보고서도 건넨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고 또 그래야 의리있는 사람이다, 이런 시각이 있는데 나는 거기에 절대로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김선배를 항상 위태롭게 보아왔다. 대통령을 속이면서 개인적인 정 때문에 직무를 포기할 것(최초 보고서를 김태정에게 유출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말함)
이라는 시각은 법무비서관이 어떤 자리인지 모르는 사람들 얘기다. 법무비서관은 막중한 자리다. 절대로 함부로 행동할 수 없다.”

사실 잘 나가던 박주선씨가 하루 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진 원인을 굳이 찾는다면 김태정 전 장관과의 특수관계로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태정 전 장관과 박주선 전 비서관은 광주고 9년 선후배 사이. 검찰 인맥에서 광주고 출신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나 박씨는 평소에도 아랫사람과 한번 술자리를 가지면 그 자리에서 말을 놓고 애정표현의 일종으로 육두문자를 동원하는 ‘김태정 스타일’에 일말의 불안감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이번 옷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김태정­박주선 콤비의 호흡은 잘 맞는 편이었다. 문민정권 사정 바람이 한창일 때인 93년 김태정씨가 대검 중수부장으로 있을 때 박씨는 중수부 과장으로 호흡을 맞췄고, 97년 김씨가 검찰총장으로 임명됐을 때는 춘천지검으로 발령난 지 6개월밖에 안된 박씨를 대검 수사기획관으로 불러들였다.

고교 후배 박주선을 곁에 두려는 김태정의 심정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두 사람은 그해 DJ비자금 수사 때 김태정씨가 발표한 ‘수사 유보’ 문안을 박씨가 작성하는 등 기나긴 인연의 끈을 맺어왔다. 그리고 DJ 정부가 출범하면서 검찰에 남아있겠다는 박씨에게 협박 반 설득 반 해서 청와대 법무비서관으로 들여보낸 것도 김태정 총장이었다.

“내가 검사의 사표로 여기는 선배는 金錫輝 변호사”

― 함부로 행동할 수 없는 막중한 자리에 있었는데 최종보고서는 김태정 전 총장에게 주지 않았는가.

“대통령에게 보고했던 최종 보고서를 김태정 장관에게 전해준 것에 대해서는 사실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그 문건은 내사 종결 직전의 사건 기록이다. 첩보를 갖고 조사해 봤더니 별 내용이 없었다. 99년 1월 당시의 상황으로 이해해달라.”

― 그런데 나중에 특검에서는 간단한 장부조작, 최종보고서 등등 사건의 실체를 파악했는데 어떻게 대통령에 보고한 내용은 그렇게 다른가

“지금 나에게 내사를 잘못한 책임을 물으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당시 우리의 관심은 옷값 대납이 실제로 있었느냐, 장관 부인들이 수천만원어치씩 호화 의상을 구입했느냐 하는 데 있었다. 옷로비 사건은 큰 사안이지만 내용은 단순한 것이다.”

인간관계 때문에 ‘부인 단속 잘하라고’ 주기는 주었는데, 김 전 장관이 그걸 신동아 로비스트 박시언에게 넘기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두 사람만의 문제로 끝났을 일이 결국 자신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함정이 된 것에 대해 김태정씨나 박주선씨는 이른바 ‘신동아 음모론’을 제기하고 있는데, 자세한 얘기는 뒤에서 다루기로 하고 박주선의 검사 시절로 되돌아가보자.

검사 박주선의 성장은 눈부셨다.

70년대에 청와대 파견 검사(사정담당)
를 지내고 5공 시절 서울지검장→검찰총장→법무부 장관으로 탄탄대로를 걸은 김석휘씨를 ‘모델’로 삼은 탓인지, 검찰총장을 향한 박검사의 야망은 그 자신을 대한민국 최고의 특수수사통으로 채찍질해갔다. 물론 지검장 김석휘와 초임 검사 박주선의 관계는 ‘말을 안해도 마음을 아는’ 선후배 관계였다.

5공 시절부터 박검사가 다룬 굵직한 사건들의 면면을 되돌아보면 검사로서 그의 일 욕심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 일목요연하게 드러난다.

먼저 엘리트 의식으로 똘똘 뭉친 데다 혈기왕성하기까지한 특수부 초임 검사 박주선에게 영광과 시련을 동시에 안겨줬던 81년 저질연탄사건. 당시 박검사는 동력자원부 석탄국장을 수뢰 혐의로 전격 구속했다. 석탄산업합리화 정책에 따라 업체에 채탄자금이 주어지던 때였는데, 서울지검의 신출내기 박주선이 주무국장을 구속시켜버렸으니 권력층의 얽히고 설킨 커넥션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서슬푸른 군사독재 시절이었다.

더구나 당시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전두환 대통령의 처삼촌 이규광씨가 광업진흥공사 사장으로 있었다. 청와대·안기부·경찰·업계 등의 조직적인 압박이 가해졌다. 박주선에 관한 온갖 음해성 투서들이 권력기관에서 권력기관으로 흘러다녔다.

권력의 끝발이 작용하는 현실에서 검찰 조직이 당해내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었다. 검찰 수뇌부에 박주선의 사표를 받아내라는 압박이 가해졌다. 그래도 박주선은 사건을 밀어붙여 1심, 2심, 3심에서 전부 유죄를 끌어냈다. 아마 중간에 무죄 선고라도 나왔다면 박주선은 꼼짝없이 사표를 내야 했을 것이다.

그런 압박만 없었더라면 장관 구속까지 갈지도 모를 사건이었다는 것이 당시 법조계의 시각이었다. 그러나 초임 검사가 원리원칙을 고수한 대가치고는 검찰 조직이 입은 타격이 컸다. 99년 봄 심재륜 대구고검장의 항명 사태나 97년 한보 수사 때 중수부장 교체처럼, 저질연탄사건은 단일사건으로 검찰 조직 전체가 흔들린 80년대의 대표적 사건으로 기록돼 있다.

“요즘 내 심정이 그때와 비슷해요. 외로운 투쟁이었지, 외로운 투쟁…. 검사들은 명예를 먹고 살기 때문에 위에서 옷을 벗으라면 벗지. 국가에서 필요없다고 하는데 구차하게 붙어 있을 검사는 없어. 당시 서울지검은 검사장이 좌천성 승진이라고 해서 서울고검장으로 옮겼고, 특수1부장은 보직도 안줬고, 특수2부장은 서울고검으로, 3차장은 부산지검 2차장으로 쫓겨났어. 그때 김석휘 지검장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몰라. 내 사건 기록을 다 보더니 담배 한대를 권했지. 그래서 내가 지금도 어른들 앞에서 맞담배하는 버릇이 생겼어요. 결국 나 혼자 끝까지 공소를 유지해 승리하기는 했지만….”

85년도에도 그는 또 한번 법복을 벗을 위기에 처했다. 치안본부 뇌물을 받은 특수수사대 경찰관 5명을 구속시킨 사건인데 저질연탄사건 때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었다.

사실 위 두 사건의 경우 법조계에서 받아들이는 강도와는 달리, 일반인의 뇌리에서는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나 특수수사통 박주선 검사의 ‘화려한 경력’에 대해서는 법조계에선 잘 알려져 있다. 박씨는 5공·6공·문민정부를 거치면서 동기들 중에서 줄곧 선두를 달려왔다. 서울지검 특수부에서 출발해 대검 검찰연구관, 대검 초대 환경과장, 대검 중수부 3과장·2과장·1과장, 서울지검 특수2부장, 서울지검 특수1부장, 춘천지검장, 대검 중수부 수사기획관 등 요직을 거쳤다. 호남 출신이 주요 보직에서 불이익을 받는다는 통설을 뒤엎기라도 하듯 승승장구해온 것이다.

그 때문에 그가 다룬 사건 중에는 기억에 생생한 대형 사건들이 유독 많다.

굵직한 사건만 꼽아 보아도 앞에서 언급했던 저질연탄사건(81년)
을 비롯해서 ▷이철희·장영자 구속 사건(82년)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외화 밀반출 사건(93년)
▷대전 EXPO 조직위원회 비리사건(94년)
▷덕산개발 부도 사건(95년)
▷이성호 보건복지부 장관 부인이 연루된 안경사협회 로비 사건(96년)
▷이용희 국민회의 부총재를 구속시킨 서울시교육감 선거비리 사건(96년)
▷지난 대선의 최대 쟁점이었던 DJ비자금 사건(97년)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외화 밀반출 사건은 ‘한번 물면 놓치지 않는’ 박검사의 치밀함을 잘 드러내주는 사례이기도 하고, 박씨가 이번 옷로비 의혹 사건의 또 다른 주역인 신동아그룹의 로비스트 박시언과 맺어진 계기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당시 김승연 회장은 거액의 외화를 해외로 빼돌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호화 별장을 구입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김회장은 처음에 검찰에서 이를 순순히 시인하지 않았다. 김회장은 검찰에 나올 때마다 “LA 별장이 나의 것이 아니고 신원을 알 수 없는 외국인에게 명의만 빌려준 것”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박검사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김회장과 박검사간의 밀고 당기는 신경전은 두달여나 계속되었다.

통상 외화밀반출 사건의 경우 국내에서 정확한 물증을 찾아내지 못하면 ‘검찰의 패배’로 끝나기 십상이다. 특히 우리 사법권이 미치지 않는 외국에서 벌어진 일이어서 수사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당시 대검 중수부 3과장이었던 박씨는 포기하지 않고 자비를 들여 미국의 사립탐정을 고용하기도 했고, 그 와중에서 박시언씨의 동생이자 재미 변호사인 박○○씨도 연결되었다. 중수부 3과에는 차곡차곡 자료들이 쌓여갔다.

검찰이 미국 현지에까지 수사의 손길을 뻗치자 김승연 회장이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김회장은 대검 특별조사실에서 마주앉은 박검사에게 LA 별장의 실소유주는 자신임을 시인했고 문제의 자금 출처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털어놨다. 선처를 호소했지만 김회장은 구속됐다. 검사 박주선의 화려한 경력에 또 하나의 ‘별’이 추가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 사건 이후 박검사는 검찰 내에서 ‘박주선이 한번 수사하면 죄가 밝혀지지 않고는 (피의자가)
밖에 못나간다’는 검사로서는 가장 영광스런 이미지를 굳혔다. 한편으로는 ‘지독한 검사’라는 얘기도 듣게 됐다. 역시 ‘독종 검사’ 출신인 홍준표(전 한나라당 의원)
변호사의 평가인데, 독종으로부터 ‘지독하다’는 평을 들었으니 수사에 임하는 박검사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토록 집요한 스타일이 되었을까. 먼저 ‘꿈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그야 검찰총장이지. 모든 검사의 꿈이니까. 이룰 수만 있다면 영광스런 일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입장이니 꿈을 거론할 계제가 아니다. 모든 진상이 밝혀져 명예회복되면 검사를 계속하고 싶다. 진상이 밝혀지고 최초보고서를 유출하지 않은 것이 입증되더라도 더 이상 검사직을 유지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냐는 시각이 있는데, 나는 그런 시각에 동의할 수 없다. 현실적으로 선배나 후배들에게 부담을 주겠지만 검사를 계속하고 싶다.”

검찰총장 야망이 박주선을 근성있는 검사로 키웠다

바로 그것이 핵심이다. 어쩌면 서울지검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한 이래 그를 최고의 특수수사통으로 키운 것은 ‘검찰총장’이 되겠다는 야망, 바로 그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번 물면 놓치지 않는 승부근성도 생겼고 단 하나의 오점도 남기지 않으려는 듯 철저한 자기관리를 해왔을 것이다.

박씨는 검사 생활의 4분의 3을 특수부에서만 보냈다. 인지사건만 전담하는 특수수사통의 경우 오래 하다 보면 적이 많이 생기게 마련인데 박씨는 조금 예외적이다. 수사에 임하는 그의 원칙 중 하나는 ‘항상 상대방(피의자나 참고인)
이 승복하는 수사를 해야 한다’는 것.

― 어떤 검사가 좋은 검사라고 생각하는가?

“치밀하고 예리하고 정의감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항상 후배들한테 ‘우리는 인간을 다스리는 직업이 아니고 죄를 다스리는 직업이라는 점을 명심하라’고 말한다. 더불어 절대로 죄만 잡는 콜롬보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문한다. 승부근성이 있으면서도 눈물이 있는 검사가 좋은 검사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달랠 수 있고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검사는 어른스러워져야 한다. 아무리 피의자라고 하더라도 감정적으로 사람을 대하지 말라는 얘기다.”

이런 말도 했다.

“수사는 만능이 아니다. 의사에 비유하면 검사는 이미 불거진 환부를 수술하는 외과의사다. 따라서 검사는 필연적으로 과거사를 논하는 직업이다. 그러나 꼭 수술 잘하는 의사만이 좋은 의사는 아니다. 수술하지 않고 병을 고치겠다는 의사도 좋은 의사다. 좋은 검사가 많이 나오려면 사회 전체에 제도적으로 비리를 방지하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시민들의 고발 정신도 필요하고. 우리는 그런 것이 없다. 부정부패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수사를 제대로 하려고 하면 경제 불안을 야기한다, 사회가 불안해진다고 하는 얘기가 나오니 다 파헤칠 수가 없다.”

박씨가 규정한 ‘좋은 검사’에 가장 어울리는 인물은 아마 박씨 자신일 것 같다. 국민회의 이용희 부총재를 따뜻한 말 한마디로 혐의 사실을 술술 털어놓게 하고 오히려 재기할 수 있다고 위로한 것이나, 지독하다는 소리를 듣는 그였지만 대전 EXPO 조직위원회 비리사건 수배자를 “형평에 어긋난다”는 비판을 들으면서도 불구속 기소한 것은 법조계에서는 꽤 유명한 일화다. 당시 수배자였던 모부처 5급 공무원인 김모씨는 도피중에 “암으로 투병중인 아내가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는데 마지막 병간호를 위해 구속은 말아달라”는 편지를 담당검사 앞으로 띄우고 자수했는데, 대검 중수2과장이던 박검사가 전격적으로 불구속 처리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박씨는 최근 옷로비 사건을 수사하는 대검 동료 검사들의 태도에 대해서는 내놓고 말은 못해도 ‘감정’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먼저 그는 최종 보고서 유출 혐의에 대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할복을 하든 머리를 뽀개든 내 속을 보여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직동 최광식 팀장과 팀원들은 유출된 최초 보고서를 나한테 보고했다고 진술하고 그것이 받아들여지면 법률적으로 깨끗해진다. 그러니 나에게 보고했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내가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고 했다면 왜 대통령에게 올리는 최종보고서에 최순영 회장을 사법처리해야 한다고 했겠나.”

“할복 해서라도 내 속을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

─ 그런데 지금 검찰은 최초보고서 유출 혐의를 박 전 비서관 쪽에 두는 것 같다. 정말 사직동팀으로부터 최초보고서를 전달받지 못했나.

“배정숙씨가 공개한 최초보고서가 세 종류 있는데, 날짜하고 내용이 서로 맞지 않는다. 그리고 1월14일 앙드레김 관련 보고서에는 제목도 없다. 사직동팀이 나에게 서류 보고를 하면서 제목도 없는 문건을 보고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최광식 총경이 다른 것 때문에 압력을 받고 있는 것 같다. 법무비서관이라는 자리가 대통령을 속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나는 대통령 앞에 서면 한없이 작아진다.”

-최총경이 대검 수사팀으로부터 허위 자백을 강요받았다는 얘기인가. 그렇다면 그 내용은 무엇인가.

“지난해 경찰 인사 때 최총경은 승진하지 못했다. 어떤 내용인지는 말할 수 없다.”
어쨌든 박씨는 손색없는 검사였다. 검찰 조직에서 출중한 실력을 인정받았던 박씨는 진작부터 검찰 안에서 ‘장래의 총장감’이라는 평을 받아왔다. 몰론 객관적으로 말하면 검찰 안에 유능한 인재가 한둘이 아니고, 또 검찰총장이라는 자리가 오직 실력만으로 오르는 자리는 아니라는 점에서 그는 어디까지나 각 기수 선두주자들에게 따라붙는 ‘총장감’, 즉 하나의 가능성일 따름이었다.

검찰 안에서 탄탄대로를 걷던 그가 일생일대의 전환점을 맞은 것은 DJ의 집권이었다. 처음 그는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초기 비서실 인선을 진두지휘했던 김중권 전 실장이 염두에 두었던 법무비서관도 박주선 검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김태정 총장이 강력하게 천거했고 국민회의 실세들도 박씨를 추천했다. 검찰총수인 김태정 총장으로서는 청와대 법무비서관에 호흡이 잘 맞는 사람이 앉아야 권력과의 의견 조율이 쉬울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법무비서관이라는 자리가 워낙 막강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법무비서관은 ▷국가 사정작업의 기획(사정 기획)
▷공직기강의 확립 및 고위공직자 동향파악(공직자 기강확립)
▷고위공직자 인선 자료 스크린(통치인사 보좌)
등을 주업무로 하는 자리다. 그러나 동시에 정치검사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에 딱 좋은 자리이기도 했다. 경남 출신으로 대검 중수부 4과장을 지내고 YS 정권에서 내내 법무비서관으로 있었던 배재욱(裵在昱)
씨는, 정권이 바뀌고 난 뒤 98년 11월 진로그룹으로부터 1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또한 그 뒤에 DJ비자금 관련 내사자료를 사직동팀으로부터 받아 이를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에게 건넨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김태정 전 총장에 의해 등을 떼밀리다시피 청와대에 입성한 박씨는 특유의 성실함을 바탕으로 금방 DJ의 신임을 받으며 안착했다. 청와대 법무비서관에 임명되기 전까지 박씨는 단 한번도 DJ를 직접 만난 적이 없다. DJ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면 DJ비자금 사건 수사를 담당했다는 것 정도다. 그러나 그는 지난 대선에서 대다수 호남 출신이 그러하듯 DJ의 당선을 애타게 기원했다. 이회창 후보가 집권하면 DJ비자금 수사를 유보한 검찰팀으로서는 스스로 옷 벗을 것을 각오했을 것이다.

그는 대통령 선거를 가슴 졸이며 지켜보았다. 선거 개표가 진행되던 12월18일 새벽, 박씨와 함께 개표 방송을 지켜본 한 고향 친구의 기억이다.

“새벽 3시30분에서 4시 사이였다.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이 거의 확정되는 순간, 주선이는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담배 피우는 것을 핑계삼아 자리에서 일어나 베란다로 나갔다. 그리고는 창밖 이웃 아파트 단지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한참이나 응시하다가 조용히 들어왔다.”

DJ에 대한 호남 출신으로서의 애정은 차치하고라도 박씨로서는 총장의 꿈을 접느냐 마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2년 가까이 흘렀다. 지난해 11월26일 퇴임 직전까지 그는 대통령으로부터 변함없는 신뢰를 받았다.

― 김대통령이 왜 그렇게 신임했다고 보는가. 독대는 얼마나 자주 했는가.

“내가 어른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면, 아마도 공정하고 명석한 판단자료를 갖다 드린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일에 관한 한 진중하다. 예의도 바르고. 나를 예뻐하셨다면 그런 이유일 것이다. 독대라는 표현은 부적절하고 대통령께 자주 보고드렸다. 필요하면 수시로 보고드렸다.”

그는 청와대에서도 여전히 검찰총장을 꿈꾸고 있었다. 청와대에 들어갈 때부터

“언젠가 검찰로 되돌아가겠다”고 말했던 점도 그렇거니와, 청와대 법무비서관이라는 자리가 정치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사람 하기에 따라서는 검찰총장으로 가는 ‘발판’이 될 수도 있었다.

― 청와대에서 일하라는 권유를 받고 내켜하지 않았던 것처럼, 거기에 가면 검찰총장이 되겠다는 처음의 꿈은 어느 정도 접어야 하는 것 아닌가.

“예전부터 청와대 파견근무가 검찰에서 ‘발탁’해서 가는 케이스이기 때문에 갔다오면 다 잘 풀리는 편이었다. 김두희(金斗喜)
, 정주영(鄭銶永)
, 김석휘(金錫輝)
선배가 청와대 법무(사정)
비서관으로 파견갔다가 나중에 검찰로 돌아와 검찰총장을 한 분들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외롭고 추운 벌판에 혼자 서 있다. 총장의 꿈은 사실상 접었다. 지금 그런 말을 입에 올린다는 것 자체가 사치스러운 일이다. 짧은 시간 동안 모욕은 겪을 만큼 겪었다. 후배 검사 앞에서 그는 부하 직원과 ‘대질’하는 수모도 견뎌야 했다. 그것도 누가 거짓말을 하는가를 따지는 ‘낯뜨거운’ 장면이었다. 불과 한달 전까지만 해도 자기와 머리를 맞대고 업무를 논하던 사직동팀장 최광식 총경과는 이제 원수같은 사이가 되어 버렸다. 그는 “평소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살기를 바랐지만, 요즘은 나도 모르게 미워지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12월14일 오전 11시, 기자가 박씨를 두번째 만난 날이다. 박주선 전 비서관은 약간 부은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얼굴이 좀 피곤해 보인다고 했더니,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밤에 잠이 잘 오지 않는다. 그래서 술을 좀 마시고 잤더니 이렇게 됐다”고 말했다.

“요즘은 나도 모르게 미워지는 사람들이 있다”

검찰 수사는 여전히 그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밤에 잠이 잘 온다면 그게 비정상일 것이다. 운명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마음의 정리가 덜 되어 있을 때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김태정 선배나 나나 거대하게 밀려오는 운명의 해일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원인을 찾는다면 어디 한두가지일까. 김태정 전 총장이 청와대로 들어가라고 등을 떼밀 때 모질게 뿌리치지 못한 것도 그렇고, 하필이면 연정희씨가 이 희한하기 짝이 없는 옷로비 늪에 빠져든 것도 그렇고, 김 전 총장과의 인연 때문에 보고서를 넘겨준 것도 그렇고…. 불가에서 질기고 질긴 것이 인연의 끈이라더니 선후배의 인연이 결국은 이렇게 끝을 보려고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다.

― 최근 박 전 비서관과 김태정 전 총장은 김중권 전 비서실장이 옷 사건을 키운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며 원망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김 전 실장을 원망해 본 적이 있는가.

“잘못 알려진 얘기다. 김중권 실장이 목사들 탄원서 보여주면서 내게 알아보라고 한 시점은 이미 내사진행중이었다. 내가 옷 로비 의혹을 엄정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김실장에게 얘기했는데 누구를 원망한다는 말인가. 대통령께 최회장 구속을 건의한 것도 그 때문이다.”

― 김태정 장관이 신동아로부터 협박당했다고 얘기했는데, 구체적으로 무슨 일인지 아는가?

“재벌그룹의 사활이 걸린 문제인데 왜 협박이 없었겠나. 처음 로비할 때도 온갖 채널을 다 동원하지 않았느냐. 박시언씨가 최종보고서를 공개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것 아니냐. 그러나 협박 내용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것은 모른다.”

하지만 이 급격한 추락의 원인을 따지고 들어가다 보면 결국 박씨 자신 탓일 수도 있다. 꿈을 향해 한 계단씩 밟아온 과거의 페이스에서 벗어나 그는 너무 오래, 너무 높이 날았다. 태양 가까이에 다가서면 날개가 녹아버린다는 그리스 신화의 경고를 깜빡 잊은 것이 문제였다. 권력은 그런 것이다. 박 전 비서관은 스스로 대통령을 보필하고 권력을 지탱한다는 자부심에 넘쳤겠지만 그 사이 그의 날개는 녹아버렸고 지금은 한없이 추락하고 있는 것이다.

박씨와 대화를 주고받을 때 그의 핸드폰으로 여기 저기서 전화가 많이 걸려왔다. 그래서 대화는 중간에 호흡이 끊기곤 했다. 그 중에서 박씨가 ‘스님, 스님…’ 하면서 깎듯이 예를 차리는 전화가 한 통 있었다. 궁금해서 그에게 물었다.

― 누구 전화인가.

“백담사에 계시는 오현 큰스님. ‘백척간두에서는 손을 놔야 산다’고 그러시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