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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세상사 편력] 약자는 권력자의 어리석음 탓에 고생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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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
중앙일보 j 에디터

스코틀랜드에서 운전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에든버러 공항에서 키를 찾아 렌트한 차에 올랐지요. 한순간 느꼈던 그 까닭 모를 허전함이란…. 뭔가 없는 것 같긴 한데, 그게 뭔지 모르겠던 거죠. 바로 운전대였습니다. 운전을 하겠다는 사람이 조수석에 앉았던 겁니다.

 물론 영국에선 자동차 운전석이 오른쪽이란 걸 모르진 않았지요. 그런데도 습관적으로 왼쪽 문을 열었던 겁니다. 혼자 머쓱해서 꺼낼 거라도 있었던 양 콘솔박스를 열어보고 애써 태연한 척 내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만큼 습관이 무서운 겁니다.

 금방 익숙해지지만, 오른쪽 운전석은 아무래도 합리적이지 않아 보입니다. 세상에 오른손잡이가 훨씬 많은데 시동 걸기, 기어 변속 같은 조작을 모두 왼손으로 해야 하거든요. 서투른 왼손은 마냥 분주하고 능숙한 오른손은 참 심심했더랬지요.

 영국이 불합리한 오른쪽 운전석을 사용하게 된 건, 역설적으로 자동차의 선구자였기 때문입니다. 처음 자동차를 설계하면서 마차의 모습을 본뜬 까닭이지요. 마부는 오른쪽 자리에 앉습니다. 왼쪽에 앉아서 채찍을 휘두르면 오른쪽에 앉은 조수 얼굴이 남아나질 않겠지요. 오른손잡이가 많은지라 채찍도 오른손으로 휘두르니까요. 그 전통이 자동차에까지 이어진 겁니다. 그만큼 전통도 중요한 거란 말이지요.

 이런 예는 참으로 많습니다. 대표적인 게 컴퓨터 자판이지요. 흔히 쓰는 쿼티(QWERTY) 자판은 원래 수동식 타자기에 맞게 만든 것입니다. 키가 서로 엉키지 않도록 자주 사용하는 글자 사이의 거리를 최대한 멀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워드프로세서나 PC를 사용하게 되면서 키가 엉키는 문제가 사라졌지요. 그래서 전문가들이 손가락의 동선을 50% 이상 감소시킨 DSK(Dvorak’s simplified keyboard) 같은 자판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떤가요?

 어처구니없게도 영국 자동차의 운전석을 왼쪽으로 바꾸고, 컴퓨터 자판을 DSK로 바꿀 것을 강요하는 것 같은 일이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교통 신호등 말입니다. 익숙한 기존 신호등 대신 새로운 삼색 신호등이 더 편리하고 글로벌하니 그렇게 알고 적응하라는 얘깁니다. 나라마다 신호체계가 다르고, 때로는 한 나라에서도 지역마다 다른데 뭐가 글로벌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상식적으로 화살표는 가라는 얘긴데, 왜 가지 말라는 빨간 화살표가 필요한 건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전구 네 개만 켜도 됐던 것을 전구 여섯 개 이상 켜야 하는데 어째서 비용이 더 안 든다는 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편하고 글로벌하고 비싸지 않다 쳐도, 여전히 화가 나는 건 “앞으로 이렇게 바꿀 테니 잔말 말고 따르라”는 권력의 오만함입니다. 설령 공익을 위한다 해도, 설득 없는 통고만으로 전통과 습관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게 오만이 아니고 뭡니까.

 신호등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 전엔 수십 년간 진리였던 좌측통행이 하루아침에 오류가 됐습니다. 우측통행이 더 편하다는 지하철 계단에서 여전히 왼쪽이 익숙한 이용객들과 수없이 어깨를 부딪힐 때마다 모르모트가 돼버린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 밖에도 많지요. 과거엔 흰 쌀밥은 죄악이었습니다. 도시락 속 보리의 양이 적으면 화장실 청소를 해야 했지요. 그런데 이젠 국수까지 쌀로 만들어 먹으라고 합니다. 쌀을 먹지 않으면 애국자가 아니라는 식입니다. 황소개구리가 설치고 다닐 땐 과천청사 앞에서 보양식이라는 황소개구리 요리 시식회도 했었습니다.

 식민지배와 군사정권이 살찌운 관료 권위주의와, 경쟁적으로 함께 살쪄온 엘리트 독단주의의 뱃살 빼기가 이처럼 어려운 겁니다. 권위와 독단이 결합하면 할수록 권력의 결정은 일방적이고 비타협적이기 쉽지요.

 프랑스 우화작가 라퐁텐은 “어느 시대에나 약자는 권력자의 우열(愚劣)한 행동 때문에 고생한다”고 말했습니다. “권력자의 이유는 늘 최선의 이유”라는 말도 덧붙이지요. 권력이 어떤 어리석은 행동을 하더라도 거기엔 늘 최선의 변명이 있으며, 그 우행(愚行)에 피해를 보는 건 늘 백성들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에 동의한다면, 분노가 느껴진다면, 그때부터 권력의 오만함을 바꿀 책임이 생기는 겁니다. 스스로 바뀌어서 세상을 바꾸십시오. 나중에 하려 하다간 늦습니다. 지금부터 시작하세요. 군림과 지배, 아집과 독선의 뱃살이 생기지 않도록 자신을 단련하십시오. 이성과 합리, 타협과 설득의 근육이 단단한 몸짱이 되십시오.

이훈범 중앙일보 j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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