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간 NENE 원칙 고수한 ‘비밀의 사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경제 02면

‘달러의 신전’은 미국 연방준비제도(FRB)의 별명이다. 이에 빗대면 벤 버냉키 의장은 달러 신전의 가장 신성한 곳(지성소)을 지키는 사제장인 셈이다. 이런 그가 27일(현지시간) 세속의 무리 앞에 나섰다. 미 중앙은행 역사상 처음으로 통화 정책을 결정한 뒤 기자회견을 통해 배경과 방향을 설명했다. 주요국 중앙은행가들이 10여 년 전부터 해온 일을 버냉키는 이제 시작했다. 선진국 중앙은행 가운데 유일한 비밀의 사원이었던 FRB의 대문이 ‘활짝’ 열린 셈이다.

 대문 개방에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FRB는 1914년 설립 이후 80여 년 동안 ‘NENE(Never Explain Never Excuse) 원칙’을 고수했다. 말 그대로 금융통화 정책을 설명도 해명도 하지 않았다. 이 원칙은 1920~40년대 영국 영란은행(BOE)을 이끈 몬테규 노먼 총재가 처음 제시한 것이다. 그는 “말은 오해와 갈등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90년부터 세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해 이후 물가 억제 목표치를 공개적으로 밝히고 통화정책을 펴나가는 인플레이션 타기팅(물가안정목표제)이 중앙은행 정책의 대세가 됐다. 시장과 제대로 소통하지 않으면 실패하기 십상인 제도다. 천하의 FRB도 변화를 거부할 수 없었다. 앨런 그린스펀 당시 의장은 편법을 동원했다. 공개적으로 물가 억제 목표치를 발표하지 않는 대신 내부 기준으로만 설정하기로 했다. 어쨌든 NENE 원칙을 고수하기 힘들어진 셈이다.

 결국 그린스펀은 결단했다. 94년 2월 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를 끝내며 성명을 발표했다. 기준금리를 올렸는지 내렸는지 밝히고 그 이유를 간단히 설명했다. 이전까지는 금리를 조정했다는 사실도 알리지 않았다. FRB 설립 이후 81년 동안 유지된 NENE 원칙을 깬 것이다.

 역사는 우연한 사건에 의해서도 만들어진다. 5년 전인 2006년 4월 버냉키는 설화에 휘말렸다. 그는 “최근 의회 발언을 시장이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앞서 그는 의회에서 “경제 상황을 살펴본 뒤 금리 인상을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시장은 이를 ‘당분간 금리 인상은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이런 상황에서 버냉키가 불쑥 한 말은 ‘금리 인상 임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글로벌 주가가 급락했다. 이른바 ‘버냉키 쇼크’다.

  FRB 이사들은 재발을 막기 위해 ‘소통위원회’를 만들어 버냉키 발언을 사전검열(?)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통화정책 설명 기회를 더 늘리기로 했다. 소통 확대의 최종 버전이 바로 이날 치러진 기자회견 정례화다.

강남규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