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관리 `오너의 비상구`로 전락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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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종선기자] 올들어 월드건설ㆍLIG건설ㆍ삼부토건ㆍ동양건설산업 등 시공능력평가 100위권 이내 건설사 4곳이 기업회생절차(이하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2006년 4월까지만 해도 법정관리는 해당 기업 대주주에게 경영 활동의 종말을 통보하는 제도였다. 보유 지분 100% 소각으로 경영권을 뺏기고 노출된 개인 재산이 모두 몰수되는 것은 물론, 배임 등의 혐의로 대주주가 법정구속까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우성건설ㆍ건영ㆍ한신공영ㆍ청구·우방등의 건설회사 최대주주들은 외환위기 이후 모두 이런 과정을 겪었고, 지금도 은둔 생활을 하고 있다. 법정관리는 적어도 대주주에게는 `저승사자`였고 해당 기업도 정리되는 제도로 꼽혔다.

이런 법정관리가 최근에는 기업들이 가장 `애용`하는 경영 도피 수단으로 변했다. 경기가 특별히 나빠지지도 않았는데 신청 건수가 늘고 있는 게 이를 방증한다. 2006년 76건이었던 법정관리 신청이 2007년에는 116건으로 늘었고 2008년과 2009년에는 366건, 669건으로 증가했다.

특히 이달 13일과 15일 자발적으로 법정관리를 신청한 삼부토건과 동양건설산업처럼 대주주의 판단에 따라 자율로 법원 문을 두드리는 경우가 늘고 있다.

경영권 유지하면서 빚 탕감, 기업 신청건수 4년새 6배로

이런 데는 다 이유가 있다. 2006년 4월 회사정리법 개정으로 회사정리절차 대신 기업회생절차가 시행됐기 때문이다. 법정관리를 신청해도 기존 경영진을 그대로 경영관리인으로 활동할 수 있고 대주주의 지분 보유도 인정하는 방식으로 관련법이 바뀌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법정관리가 대주주에 유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009년 5월 법정관리에 들어간 삼능건설의 경우 최대주주 지분율이 2008년 말 37%에서 최근 21%로 낮아지긴 했지만 오너가 경영권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 회사 협력업체들은 줄도산 등의 큰 고통을 겪고 있다. 매출 채권의 60%를 떼이고 나머지 40%도 8년에 걸쳐 나눠 받는, 그야말로 빚잔치가 됐기 때문이다.

삼능건설의 협력업체였던 Y사 김 모 사장은 “경영 잘못으로 빚어진 책임을 협력업체와 소액주주들에게 떠넘기는 게 법정관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다면 이런 법원의 `도움`으로 회사 경영은 나아졌는가. 삼능건설의 매출은 2년만에 절반 이하로 떨어졌고 자산은 3분의 1로 줄었다. 시공능력 순위는 2008년 80위에서 지난해에는 162위로 뒷걸음질쳤다.

금융회사들은 회생절차의 허점을 악용하는 건설사가 많다고 지적한다. 충북 A건설사의 경우 부도 이후 회생절차를 통해 빚을 대거 탕감받았다. 그러나 이 회사 최대주주는 부도 직전 회사 자산을 바지사장(사주는 따로 있고 명목상 사장 역할을 하는 사람)을 내세워 설립한 신설법인에 대거 빼돌린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가에서는 이번 삼부토건과 동양건설의 법정관리 신청이 ‘벼랑 끝 자폭카드’로 보고 있다. 담보를 최대한 적게 잡히려는 건설사의 ‘쇼’라는 것이다. 삼부토건과 동양건설은 서울 내곡동 헌인마을 주택사업을 위해 두 회사 연대보증으로 20개 금융회사로부터 4270억원을 프로젝트파이낸싱(PF)했다.

그러나 땅 매입 및 인·허가가 어려워 착공도 하지 못한 채 PF만기가 됐고, 일부 저축은행이 만기 연장을 거부하자 두 건설사가 차례로 회생절차를 신청했다.

익명을 요구한 B증권 크레딧 애널리스트는 “기업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채권단은 최장 20년을 기다려야 돈을 회수할 수 있기 때문에 금융회사에 절대 불리하다”며 “담보 여력이 있는 건설사가 법정관리를 신청한 건 금융회사를 압박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려는 의도로 볼 수밖에 없다”고 풀이했다.

건설사 "호황 때 과실 따먹고…혼자 살겠다는 금융사 탓

그러나 건설사들의 얘기는 완전히 다르다. 건설사를 벼랑 끝으로 몰고간 장본인이 바로 금융회사라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C건설 사장은 “주택경기 호황의 과실은 모두 금융회사가 챙겨 먹었다는 게 건설사 CEO들이 입을 모아 하는 얘기”라며 “그동안 건설사 보증으로 땅 짚고 헤엄치기 식으로 수익을 챙기다 경기가 나빠지자 건설사에 모든 책임을 지우려는 게 그들의 행태“라고 비난했다.

D건설 영업본부장은 “주택사업을 하다 보면 일정이 늦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은행은 자신들이 어려워졌다는 이유로 갑자기 PF 연장을 거부한다`며 "이는 은행만 살고 건설사는 죽이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PF가 잘못됐다면 해당 사업에 돈을 댄 은행과 사업을 진행하는 건설사가 함께 책임을 지는 게 맞다”고 주장했다.

올들어 건설사들의 법정관리 신청이 늘어난 건 지난해 말 기업구조조정촉진법(기촉법)이 일몰된 원인도 크다. 지난해까지는 대주단의 75%(대출액 기준)만 동의해도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주채권자인 시중은행이 동의하면 후순위채권자인 저축은행 등의 의사와 상관없이 워크아웃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이 비율이 100%로 바뀌면서 워크아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삼부토건과 동양건설의 경우처럼 한 프로젝트에 대해 돈을 빌려준 금융회사가 20곳이나 되기 때문이다.

워크아웃에 대한 좋지 않은 학습효과도 영향을 미친다. 현재 워크아웃을 진행중인 모 건설사 재무팀장은 “은행 관리인이 들어온 후 곶감 빼먹듯 건설사의 남은 자산을 모두 대주단이 처분하고 있다”며 “건설사를 말라 죽이는 게 워크아웃”이라고 했다. 익명을 요구한 D건설사 최대주주는 “나라도 자금난에 처하면 법정관리를 신청하겠다”고 말했다.

단국대 부동산학과 김호철 교수는 “지난해말로 기촉법 시행이 끝난 후 대체 법안이 없어 시장이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이라며 “각계 각층의 의견을 수렴해 합리적인 기업구조조정 관련 법안을 시급히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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