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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강국에 도전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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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는 한 세기 전 최초의 공상과학소설 붐이 일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주된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하나는 문학적인 이유다. 서양의 다양한 이상주의적 작품과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 일주’, ‘해저 2만리’ 같은 모험소설이 당시 중국어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다른 하나는 기술적인 이유다. 화학에서 전기·풍선·자동차에 이르기까지 과학·교통수단에서의 새로운 발전에 대한 중국인들의 관심이 커졌다. 마지막 이유는 정치적인 것이다. 청조(淸朝)
가 자체적인 무능과 침략국들의 가공할 화력으로 곧 해체될 것이라는 확신이 높아가고 있었다.

그런 공상과학 소설이 붐을 이루게 된 배경에는 중국의 앞날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중국이 그 이전에 그 의문을 그토록 단순명료하게 던진 적은 없었고, 그에 대한 이해관계가 그처럼 높았던 적도 없었다. 최근 미국 컬럼비아大의 데이비드 왕이 흥미진진한 연구에서 보여주었듯 이 중국 작가들은 50년∼1백 년 뒤의 다양한 미래 시점을 기준으로 광범위한 가능성을 제기했다. 당시의 한 소설에서는 중국이 수십 년 간의 내전과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을 견뎌낸 뒤 1960년대 들어 강력한 공화국으로 등장한다. 또다른 소설에서는 현명한 중국 통치자가 중국의 전통적인 미덕과 구미의 첨단문화를 혼합해 새로운 문명을 건설한다. 그 나라는 국력이 강하고 평화로우며 부유해 인접 ‘야만’국의 반체제 인사들이 그곳으로 피신한다. 또다른 소설에서는 중국 여성들이 주역이 된다. 그들은 성적으로 독립되고 기술적으로 뛰어난 새 사회를 건설하고 1백만 명으로 구성된 전국 조직의 비밀 무정부주의 기구를 통해 자신들의 힘을 과시한다.

이런 소설 가운데 가장 종말예언적인 것은 ‘新시대’다. 청조가 무너지기 직전인 1908년 발간된 이 소설은 1999년 동유럽에서 시작된 황인종과 백인종들 간의 잇따른 거대한 전쟁을 그렸다. 세계 곳곳의 화교들이 중국을 지원하기 위해 봉기해 미국 서부와 호주에서 독자적인 중국 공화국들을 설립하고 파나마 운하를 장악한다. 그 전투에서 양측은 잠수함, 방탄복, 방사선 낙진, 전자 교란 방패막, 독가스 등 모든 새로운 군사기술을 총동원한다. 중국 연합군이 마지막 승리를 거두고 서양 열강과 조약을 체결한다. 그 조약에 따라 중국은 싱가포르·실론(현재의 스리랑카)
·봄베이(현재의 인도 뭄바이)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게 되고 아드리아海에 기지를 확보하게 된다. 게다가 모든 중국인은 그때부터 중국의 전통적인 달력을 수용하고 그에 맞춰 생활하게 된다. 고대 전설에 나오는 황제(黃帝)
의 통치시기에서부터 계산하는 전통적인 달력을 사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조약이 체결된 해는 ‘서기 2000년’과 ‘황제기 4707년’으로 병기된다.

이런 공상은 중국이 국가적으로 허약한 시기에 형성됐다. 중국은 1895년 대만을 일본에 빼앗겼고, 중국 정부는 1900년 의화단 사건 후 다국적 원정군에 점령당했다. 그리고 중국의 주요 도시에는 중국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 외국인 거류지가 생겨났다.

물론 오늘날 중국의 국력은 한 세기 전보다 훨씬 강하다. 그러나 당시 공상에 불과했던 소설 속의 그런 요소들은 지금의 현실과 이상하게 맞아떨어지는 느낌을 준다. 소설 속에 나오는 전국적인 조직을 가진 비밀 여성 무정부주의자들은 지금 베이징 등의 도시에서 대담하게 시위를 벌이는 파룬궁(法輪功)
추종자들과 유사하다. 코소보 전쟁에서 유고 베오그라드 소재 중국 대사관에 대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의 오폭은 느닷없이 동유럽을 중국-서방 관계의 핵심으로 끌어들이며, 중국에서 반미 시위와 보복 촉구 시위가 발생했다. 중국은 최신 핵·로켓·잠수함 기술에 대해 모든 국제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수출국으로 부상했으며, 세계 전역을 영향권 내에 둘 수 있는 잠재력을 비밀리에 확보하고 있다. 그리고 조화롭고 질서정연한 공화국에 대한 희망도 아직 현실화되지는 않았지만 1989년 민주화 시위 때 탄압에 굴복하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에 의해 지속되고 있다.

21세기가 중국의 세기라면 중국은 과연 어떤 식으로 부상하게 될까. 20세기 들어 미국이 최강대국으로 점진 부상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19세기 때 맹위를 떨쳤던 영국이 사용한 방법도 아닐 것이다. 또 13세기에 갑작스럽고 맹렬하게 팽창했다가 무너진 몽골제국과 같을 수도 없다. 분명한 것은 중국의 아이디어와 현실이 새로운 합성으로 뭉쳐질 때에만 중국의 세기가 온다는 점이다. 그런 합성에는 세 가지 요소의 창의적인 혼합이 필요하다. 첫째 요소는 영토 그 자체다. 영토는 모든 제국처럼 확장-축소-분리의 과정을 겪는 가변적인 개념이다. 둘째 요소는 중국의 고유한 문화와 다민족 유산을 받아들이고 동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셋째 요소는 재외 화교들이 중국 문화의 개념을 넓혔으며 진정한 세계적인 차원을 부여했다는 점에 대한 인식이다.

중국의 인적자원은 풍부하지만 천연자원은 제한돼 있다. 중국을 미래의 강대국으로 상정하려면 먼저 중국의 명백한 약점들을 없앨 수 있는 과학적인 진보를 가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 중국의 무기를 개선할 나노(10억분의 1을 가리키는 말로 ‘극소’를 의미한다)
기술, 사막을 곡창지대로 바꿔놓을 수경재배법, 기존의 축산업을 혁신할 유전공학, 지금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값싼 통신방식 등이다. 오늘날 중국 공상과학 소설가들은 여전히 민족주의자일지 모른다. 그러나 중국 본토·대만·홍콩·동남아·미국·캐나다 등 다양한 지역 출신인 그들은 각 지역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어떤 작가는 대만에서부터 시작한 민주화 물결이 본토로 건너와 중국 재건으로 이어진다고 서술했다. 어떤 이는 거대한 도시 블록이 중국 본토에서 떨어져 나와 정박할 곳을 찾아 세계를 정처없이 떠돌 것이라고 상상했다. 또다른 작가는 내전으로 황폐해진 중국이 몰락과 정치적 분열의 길을 걸으며 수십억 명의 중국 탈주민이 다른 나라의 안전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를 것으로 그렸다.

여기 제시된 시나리오는 모두 실현 가능성이 있을지 모른다. 영국 여왕이 임명하는 캐나다 신임 총독으로 중국계(홍콩 출신)
아드리엔 포이가 발탁되고 1천2백70억 달러 규모의 보다폰 에어터치社와 만네스만社의 인수전쟁에서 홍콩 선박왕 리카싱(李嘉誠)
이 막대한 이익을 얻는 요즘의 세계에서는 이미 과거가 미래와 뒤섞여 있는 셈이다. 거기에 이성적인 판단으로 덧붙일 수 있다면 그것은 단지 21세기가 전례없는 융통성이 필요한 새로운 기회의 세기며 그런 조건에서는 거대한 소비시장·노동력·에너지를 가진 중국이 그 앞에 펼쳐진 어떤 기회든 대담하게 추구할 것이라는 점뿐이다. 여러 곳의 중국이 글로벌 게임에서 엇갈리는 승부수를 던지는 이같은 광범위한 맥락에서는 특정 무역협정의 세부사항이나 중국 일부 지역과 관련된 정책은 중요성을 잃는다.

‘중국의 세기’라 이름 붙일 만했던 마지막 시기는 11세기였다. 11세기의 중국 宋나라는 지구상에서 가장 광활하고 효율적인 국가였다. 기술혁신, 진취적인 산업, 풍요한 농업, 폭넓은 교육기회, 종교적·철학적 관용이 결합된 행정 전통에서 그런 강대국이 건설됐다. 宋이 쇠퇴한 가장 큰 원인은 취약한 군사력이었다. 적군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재물 공여로 달래려 했던 것이다. 중국이 국경을 효율적으로 지킬 수 있고 외세 간섭을 막는 동시에 과거 宋의 긍정적인 면모들을 다시 결합할 수 있다면 다시 한번 ‘중국의 세기’를 맞을 수 있을 것이다. 로마제국을 제외한다면 그런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단일 국가는 지금까지 없었다.

Jonathan Spence
뉴스위크한국판(http://nwk.joongang.co.kr) 제 410호 1999.12.29/20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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