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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물상 서한구씨네의 소문난 가족사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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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봄을 시샘하는 꽃샘 추위가 채 가시지 않았지만 한시도 쉬지 않고 주워온 고철을 정리하고 그것을 녹이는 작업에 열을 올리는 중년 남성이 있다. 바로 이곳 고물상의 주인이기도 한 서한구(58)씨. 서씨는 하루하루 고철을 모아 생활비를 마련하는 고단한 삶 속에서도 가족 사랑이 유별나기로 동네에서 소문이 자자하다. 자녀들에게는 존경 받는 아버지로, 부인에겐 사랑 받는 남편으로 인정받고 있는 서씨를 만났다.

글 ·사진=조영민 기자

서한구씨의 가족들이 아프리카 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왔을 당시 촬영했던 가족사진. 오른쪽은 서한구씨가 자신의 고물상에 고철 녹이는 작업에 열중하는 모습.

18년간의 아프리카 생활

서씨는 1982년 10월 지금의 부인 신은순(54)씨를 만나 결혼했다. 가난한 가정 형편 때문에 신혼 살림은 넉넉지 못했지만 서씨의 긍정적인 사고 방식 덕에 행복한 가정을 꾸려 나갔다.

 축협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하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호주로 한 달 동안 출장을 가게 됐고, 머물던 숙소에서 아프리카 콩고의 한 장관을 만나 친분을 쌓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콩고 장관으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된다. 서씨의 성실함에 반한 장관이 자신이 자국에 소유하고 있는 넓은 대지와 수백 마리의 가축들의 관리를 맡기고 싶다는 제안이었다. 낮선 곳에서의 생활에 고민도 했지만 높은 연봉에 호화로운 자택, 고급 승용차와 집사 등을 일체 제공해준다는 약속에 그 해 봄 고국 생활을 정리한 뒤 부인과 4살 된 아들을 데리고 콩고로 이주했다.

 몇 년간 상구씨 가족은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그 곳에서 두 딸을 더 얻었고, 어딜 가나 그들 가족은 극진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부와 명예를 동시에 누리던 콩고의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원주민들의 잦은 폭동과 내전으로 서씨 가족은 불안에 떠는 시간이 늘어났고, 급기야 그들을 돌봐주던 콩고 장관이 현직에서 물러나자 떠돌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고국으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계속되는 비행기 결항과 출국 심사의 어려움 등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서씨 가족은 고심 끝에 그곳에 좀더 머물기로 했다. “그때 당시에는 오고 싶어도 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자금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무정부 상태에서 출국 자체가 어려웠거든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합니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서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써 가족을 책임지고 나아가 내전으로 고통 받는 어려운 원주민들에게 힘이 돼주고 싶었다.

 그때부터 고국으로 돌아온다는 꿈은 잠시 접어두고 가족들과 함께 아프리카 곳곳을 누비며 구호활동에 힘썼다. 부상을 입은 원주민들의 고통을 수지침을 이용해 치료해주고 자금을 털어 식량을 대는 등 평화를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렇게 그의 나이 45세가 되던 해. 아들 현욱(26)씨의 군입대 문제와 두 딸의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장장 18년의 아프리카 생활을 마치고 한국 행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됐다.

순탄치 않았던 고국생활

18년 만에 서울로 돌아온 서씨 가족에겐 앞으로의 생활자체가 막막했다. 구호활동 시절 틈틈이 모아둔 돈은 비행기 값으로 써서 자금적 여유가 없었고, 고국의 환경도 낯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낮에는 막노동을 하고 야간에는 음식점과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 마련에 힘썼다. 3남매들도 진학을 포기하고 일을 하며 힘을 보탰고 부인도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돈을 벌었다.

 하지만 가족들 모두가 20년 가까이 타지 생활을 하다 보니 세상물정에 서툴러 그간 모았던 돈을 사기 당하기도 했다.

 “어렵사리 모은 돈으로 조그만 가게를 꾸려나가려고 했는데… 사기를 당하자 앞길이 막막했어요. 하지만 크게 낙담하진 않았어요. 언제나 내 곁을 지켜주는 소중한 가족이 있으니까요.” 시련은 있었어도 포기는 없었다. 거처를 서울에서 아산으로 옮긴 상구씨는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현재 운영중인 고물상을 무상으로 임대 받게 됐다. 고물상에서 그는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했고, 비록 돈은 많이 벌지 못했지만 아내와 아이들에게 ‘사랑’만큼은 아낌없이 주려고 노력했다.

내가 줄 수 있는 게 있다면…

어려서부터 아프리카에서 자란 맏아들 현욱씨는 아버지를 한번도 원망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존경했다.

 현욱씨는 아버지를 도와 막노동을 하면서도 동생들을 챙기고 어머니를 위로하는 당찬 모습을 보였다. 그는 서씨에게 항상 “저에게 아버지는 언제나 그늘 같은 존재입니다. 아버지께서 하셨던 구호활동이 자랑스러워 나중에 커서 인류평화에 기여하는 멋진 한국인이 될 것이라는 꿈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고 말하곤 했다.

 그는 고국에서 학교를 다닌 적이 없지만 군대만큼은 자원 입대해 2년간의 복무를 마치고 현재 미국 아이비리그 중 하나인 콜럼비아대학 1학년에 재학 중이다. 독학으로 미국 대학입학자격시험(SAT)을 준비한 끝에 지난 9월부터 4년 전액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콜럼비아 대학 GS(school of general study) 과정을 다니고 있다.

 GS 과정은 고3 학생이 졸업 후 바로 진학하는 CC(Columbia college)와 달리 학업중단자, 정상적인 학교과정을 이수하지 못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과정이다. 교수진, 교육과정, 동문 네트워크, 학위과정 등은 CC와 동일하게 운영된다.

 돈이 없어 학원 한번 다니지 못했지만 ‘가족사랑’의 힘으로 공부해 SAT 1400점(1600점 만점)을 받았고, 토익 에서 990점 만점을, SAT 프랑스어 시험에서도 만점을 받았다.

 둘째 딸 예승(21)씨도 같은 해 미국 명문대 베레아 대학에 진학했다. 그 역시 4년 전액 장학금과 기숙사 경비 등을 지원받는 조건으로 1학년에 재학 중이다.

 막내 딸 예화(19)양도 현재 독학을 하며 SAT 시험을 준비 중에 있다.

 서씨는 “자식들에게 사랑하고 한편으론 미안하단 말을 전해주고 싶다. 공부는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다. 아이들의 꿈을 이루기 위해 내가 줄 수 있는 게 있다면 모든 걸 주고 싶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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