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미국 첫 여성 부통령 후보 타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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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부통령 후보로 나섰던 제럴딘 페라로. 그는 당시 월터 먼데일 대통령 후보와 함께 대선에 나섰지만 공화당이 내세운 로널드 레이건-조지 부시 후보에게 패배했다. 사진은 페라로가 84년 당시 미시시피주 잭슨에서 선거 유세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잭슨 AP=연합뉴스]


2008년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 당시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은 버락 오바마(Barack Obama)에게 패한 뒤 말했다. “결국 ‘유리 천장’(Glass Ceiling)을 깨지 못했다”고. 유리 천장은 여성의 정치·사회적 진출을 가로막는 미국사회의 보이지 않는 장벽을 뜻한다. 1984년 주요 정당 부통령 후보로 나서 미국 정치사상 처음으로 유리 천장 깨기에 도전했던 제럴딘 페라로(Geraldine Ferraro)가 26일(현지시간) 타계했다. 75세. 페라로는 지난 12년 동안 혈액암과 싸워왔으며, 보스턴의 종합병원에서 숨을 거뒀다고 가족들은 전했다.

 이탈리아계 미국인으로 뉴욕에서 태어난 페라로는 9세 때 아버지를 잃었다. 대학을 가려는 페라로를 놓고 삼촌은 “예쁘게 생긴 애가 시집가면 됐지 무슨 공부냐”고 말했다. 그러나 페라로는 장학금을 받고 매리마운트 맨하튼 대학에 들어갔다. 가족 중 처음 이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됐지만 만족하지 않았다. 포드햄 대학 로스쿨을 거쳐 검사와 변호사가 됐다. 당당한 경력을 쌓은 페라로는 1978년 뉴욕주 연방 하원의원에 도전해 성공했다. 이후 3선(6년)을 기록했다.

 페라로의 전성기는 1984년 민주당 월터 먼데일(Walter Mondale) 대통령 후보의 지명을 받아 부통령 후보로 활약할 때였다. 먼데일은 불리했던 선거 판세를 뒤흔들기 위해 전격적으로 페라로를 기용했다. 페라로는 먼데일을 능가하는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선거에선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조지 부시(George Bush) 콤비에게 크게 졌다. 페라로는 패배 후 회견에서 “나의 출마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오래 가지 못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미국 여성들은 결코 이등시민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페라로는 상원의원으로 정치권 복귀를 노렸지만 남편 사업을 둘러싼 법적 스캔들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빌 클린턴(Bill Clinton) 대통령 시절 유엔 인권위원회 담당 대사가 마지막 공직이었다.

 페라로의 서거 소식이 전해진 후 오바마는 “여성들과 각계각층 미국인들의 장벽을 깬 선구자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애도했다. 클린턴은 “한계를 인정하지 않은 미국 여성의 챔피언”이라고 칭송했다. 2008년 미 역사상 두번째 여성 부통령 후보였던 세라 페일린(Sarah Palin) 은 “그녀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워싱턴=김정욱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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