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나는 가수다’ 에서 정의란 무엇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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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강혜란
문화부문 기자

“학연·지연 철폐? 현실은 어렵더라도 공영방송에서 개인들의 관계를 이용하면 안 되죠. 어느 철없는 가수가 울면서 이러면 안 된다고 호소하면 다 통하는 나라(입니까)?”

 22일 기자가 받은 독자 e-메일의 한 구절이다. MBC ‘우리들의 일밤’의 코너 ‘서바이벌 나는 가수다’ 원칙 파기 논란과 관련해서다 (본지 21일자 27면, 22일자 24면). 50대 중반이라고 밝힌 독자는 딸의 권유로 시청하던 중 ‘서바이벌’ 원칙을 깬 김건모의 재도전 결정에 우롱당한 느낌이었다고 썼다. 또 다른 독자도 “작은 이익을 얻기 위해 당장 원칙을 무시해 버린다면 그 결과는 반드시 더 크게 다가올 것”이라며 “우리 사회가 이런 식으로 변해 가는 건 아닌가 걱정”이라고 보냈다.

일개 예능 프로에 대한 반응 치곤 격하다. 인터넷 일부에선 제작진 교체, 나아가 프로그램 폐지까지 거론된다. 그만큼 원칙 파기에 대한 배신감이 크다는 얘기다. 애초 ‘가수들의 서열화’ ‘서바이벌쇼의 막장’이라며 ‘나는 가수다’ 컨셉트에 비판적이었던 이들도 한목소리다. 시청률 10%대 초반의 신생 프로가 이렇게 뜨거운 화두가 된 것은 왜일까.

 시청자들은 ‘평가단 판정 불복→재도전 결정’이라는 소동 속에서 우리 사회의 단면을 읽고 있다. 이들이 정색하는 대상은 예능 프로의 만듦새가 아니다. 어느 트위터리안(트위터 사용자)의 표현처럼 ‘나는 가수다’라는 우화(寓話)를 빌려 우리 사회에 태부족한 정의와 공평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개개인을 무한경쟁으로 몰고 가는 사회, 물론 가혹하다. 그러나 더 가혹한 것은 경쟁의 원칙을 일관되지 않게 바꿔 버리는 불공정 사회다. 일요일 저녁, 자녀와 나란히 지켜보던 TV에서 ‘원칙 없는 한국 사회’를 재확인한 중·장년층의 분노다.

 가수들도 피해자다. 방송이 의도한 게 소름 끼치는 라이브의 감동이든, 서바이벌의 냉혹한 경쟁 현실이든 출연 가수들은 최선을 다했다. 제작진이 탈락 원칙을 지켰다면 ‘잔인하다’는 반응이야 나왔겠지만 김건모·이소라를 비난할 이는 드물었을 것이다. 그런데 ‘무대 뒤’의 혼란을 여과 없이 보여줌으로써 아티스트들은 ‘공인’의 자질을 의심받고 있다.

 지난해 신인가수 오디션 ‘슈퍼스타K 2’는 우승자 허각씨를 공정사회의 아이콘으로 띄웠다. 공영방송 MBC와 ‘공익예능’의 대표주자 김영희 CP(‘일밤’ 책임프로듀서)가 보여주려 한 ‘가수’는 어떤 모습인가. 같은 방송사의 신인가수 오디션 제목 ‘위대한 탄생’이 무색하다.

강혜란 문화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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