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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 위기에서의 리더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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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마동훈
고려대 교수·미디어학부

지난 11일 일본 동북부 대지진이 거대한 쓰나미로 이어졌다. 지금 관심은 후쿠시마 원전 원자로의 방사성물질 유출과 핵분열 방지를 위한 일본 정부의 대응 문제로 쏠리고 있다. 극단적 위기의 극복을 위해 결사대원들의 목숨을 건 작전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 열도는 온통 공포에 싸여 있다. 전기, 물, 식료품의 품귀로 국민 생존의 문제가 커지고 있고, 도로는 피난민들로 넘치고 있다고 한다. 지구의 종말을 그린 영화의 몇몇 장면이 생각난다. 영화 속 가상의 이야기가 바로 옆 나라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근대 이후 인간은 소위 과학적인 방법으로 세상을 분석하고 설명하는 사고의 방식에 익숙해져 왔다. 이러한 사고의 방식은 자연현상뿐 아니라 인간과 사회 현상의 분석에도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다. 이상적인 형태의 과학적 설명체계를 우리는 ‘이론’이라고 부른다. 좋은 이론은 미래에 대한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현재 인류의 과학 수준으로는 대지진, 쓰나미와 같은 엄청난 대재앙을 정확하게 설명하거나 예측하지 못한다고 한다. 생명의 근본, 지구와 우주의 근원과 미래에 대한 완전한 설명은 과학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과거의 데이터를 근거로 한 통계적 설명만이 가능할 뿐 엄밀한 의미의 미래 예측은 불가능하다. 과학이 더 이상의 설명을 못 하기에 우리의 불안감은 매우 크다.

 과학적 사고의 지배로 인해 우리가 잊어 왔던 것이 있다. 근대 과학의 시대 훨씬 이전부터 있었던 우리 사회와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省察)’의 문제다. 여기에서 성찰의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며, 또한 우리 사회 공동체다. 성찰은 과학적 분석보다는 배경과 맥락, 그 파급효과의 의미에 대한 두터운 관찰과 해석에 의존한다. 지진에 대비해 건물의 내진 설계를 치밀하게 하고, 쓰나미에 대비해 견실한 둑을 만들고, 핵 방사선에의 노출을 막기 위한 기술의 고안 등 이성적·과학적 노력은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극단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국민 감성적 요소들에 대한 고려다. 위기의 충격 속에서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개인의 정서와 감정의 문제, 사회 공동체 의식의 문제, 그리고 위기 이후의 공동체와 개인의 미래 희망과 비전의 문제 등이 그것이다. 이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지금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성찰이다.

 여기에서 성찰이란 단순한 ‘반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적극적인 ‘자신과 우리의 대면’을 의미한다. 극단적 위기상황에 이성적으로 대응하는 동시에 위기에 맞서 있는 자신과 공동체의 모습을 가슴의 눈으로 바라보는 감성의 시선이 바로 그것이다. 소위 사회 안전망이라고 불리는 사회적 제도들도 이러한 감성적 공감대를 기반으로 조성돼야 한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 앤서니 기든스 등의 ‘위험 사회와 성찰성’에 대한 논의의 초점도 여기에 있다.

 성찰의 내공은 위험 사회 지도자의 필수요건이다. 지도자의 성찰은 현실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통찰력으로 이어진다. 모세는 이집트 군과 홍해 사이의 진퇴양난(進退兩難)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위기 극복을 위해 놀라운 자기 성찰과 통찰력을 발휘했다. 동요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기 극복의 길을 열어준 것은 과학적 지식이 아닌 지도자의 고도의 감정 통제 능력, 분별력, 비전의 힘이었다. 1930년대 초반 경제 대공황 극복을 위해 뉴딜 정책을 폈던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을 우리가 기억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1962년 미국의 쿠바 미사일 위기를 극복한 케네디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소말리아 해적에 납치된 극단적 위기상황에 대처했던 석해균 선장의 리더십도 여기에 해당된다.

 지도자의 리더십은 항상 위기상황에서 제대로 평가받는다.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와 시간의 압박 속에서도 지도자는 해야 할 말, 행동, 결정, 그리고 해서는 안 되는 말, 행동, 결정을 명쾌하게 분별하고 실행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가속화된다. 다시는 일어서기 힘들게 된다. 일본의 간 나오토 총리는 지금 그 중요한 시험대에 서 있다. 우리 국가, 그리고 사회 각 영역의 지도자들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을 일이다. 무너진 건물과 교량은 다시 지으면 되지만 가슴속 깊은 곳의 상처는 치유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마동훈 고려대 교수·미디어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