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친정엄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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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채는 아이 달래랴 원고 마감하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주희(배해선·김지성)는 여전히 분주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택배가 온다. 친정엄마(정영숙·연운경)가 세상을 뜨기 전, 이웃인 서울댁에게 ‘한 달 뒀다가 딸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했던 김치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친정엄마는 익은 김치만 좋아하는 딸이 혹여 덜 익은 걸 먹게 될까봐 걱정했던 것이다. 연극 ‘친정엄마(김광보 연출)’에 별다른 이야기는 없다. 딸이 찾으면 버선발로 뛰어나올 친정엄마와 그런 엄마의 희생을 당연히 여기다 뒤늦게 회한에 젖는 딸의 이야기가 전부다. 그렇다고 신파조는 아니다. 원작자인 고혜정 작가의 실제 경험담이 바탕이 된 에피소드는 감정이 넘치지 않는다. ‘엄마와 딸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김광보의 연출 의도도 극에 현실감을 더한다. 무조건적으로 희생하는 엄마라기보다 딸과 갈등도 하는 우리네 엄마를 그린다.

 전라도 정읍에서 서울로 대학을 간 딸이 엄마에겐 세상에서 제일 잘났다. 그런 딸이 전문대 나오고 집안 형편이 어렵다는 이유로 예비 시어머니에게서 무시당한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한 딸이 잘 사는지, 엄마로서는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다. 서울에선 문 밖만 나가면 지천인 먹을거리를 엄마는 한 보따리씩 챙겨 딸네를 찾아온다. 바깥 사돈 생신상을 차려주곤 딸이 곤란해질까봐 밥 한 술 뜨지 않고 고향집으로 달음질친다. 딸은 그런 엄마가 고맙지만 부담스럽기도 하다. 아이를 데리고 외출했다가 길을 잃은 엄마에게 타박도 한다. “니 새끼 잃은 것만 놀래고 찾었지. 엄마는 안 찾었지야?” 엄마의 말에 쓸쓸함이 묻어난다. “엄마는 어른이잖아.” 딸이 머쓱해 내뱉는 말에 엄마는 공허하게 답한다. “그려 맞어. 엄마는 늘 젊고 건강헌 어른이고, 새끼는 다 커도 늘 애긴께.”

 고혜정의 동명 베스트셀러 수필이 원작인이 연극은 2007년 초연 당시 고두심의 열연에 힘입어 공연가에 ‘엄마 열풍’을 일으켰다. 이후 뮤지컬과 영화로도 제작됐다.

 무대는 이야기 만큼이나 군더더기가 없다. 무대 왼쪽에는 일과 집안일에 쫓겨 지내는 딸의 공간이, 오른쪽에는 자식만 바라보고 사는 엄마의 공간이 있다. 뚝 떨어진 두 공간을 이어주는 건 전화통화다. “김치 떨어졌다” “시아버지 생신상을 차려야 하는데 도와주러 오면 안 되겠냐” 등등. 바쁘다는 핑계로 한 달 넘게 감감무소식이던 딸이 전화를 거는 이유는 뻔하다. 그런데도 “어찌 그리 무심하냐”는 서운함은 잠시, 엄마는 딸에게 뭐든지 해주고 싶어 안달이다. 제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뚝 끊어버린 뒤에도 엄마는 보물이라도 되는 양 휴대전화를 가제 수건에 꽁꽁 싸매둔다. 딸이 사준 휴대전화여서다.

 “못난 애미지만 내가 갸를 도와줘야 할 것인디. 맘에 없는 신경질도 받어주고, 엄마가 만만히서 부리는 화풀이도 받어주고…(중략)‘엄마-’ 허고 부르믄 ‘오야 우리 딸’ 허고 대답도 히줘야허고…(중략) 이 애미 잊고 살 수 있으믄 그때 갈라네.”

 죽음을 앞두고도 엄마는 딸 걱정뿐이다. 엄마가 떠난 후 쏟아내는 딸의 회한은 그래서 더 얼얼하다. “늘 내가 먼저 전화 끊어서 미안해…(중략) 친정 가서도 엄마랑 안 자고 남편이랑 자서 미안해…(중략) 그래도 가장 미안한 건, 엄마는 나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데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건 엄마가 아니어서 정말 미안해.”

 친정엄마가 그리워서인지 딸이 떠올라서인지, 객석에 앉은 반백의 관객 어깨가 연신 흔들린다. 3월 6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25일부터 4월 17일까지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연장 공연한다. 4만4000~6만6000원.

▶ 문의=1600-1716

[사진설명] 연극 ‘친정엄마’는 모녀 간의 사랑과 애증을 잔잔하게 그린다. 초연 당시 공연가에 ‘엄마 열풍’을 일으킨 작품이다.

<김은정 기자 hapia@joongang.co.kr 사진="월드쇼마켓"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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