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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의 원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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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
중앙SUNDAY 사회에디터

심리학에 따르면 ‘낙관편견(樂觀偏見·optimism bias)’이라는 심리적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기획한 프로젝트의 결과에 대해 실패보다는 성공, 부정적인 결과보다는 긍정적 결과를 예상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다. 그러나 당연한 만큼 낙관편견이 가져올 수 있는 폐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낙관편견에 대해 과학적으로 밝혀진 사실을 정부가 활용하는 사례도 있다. 영국 재무부는 2003년부터 낙관편견의 가능성을 항목화해 프로젝트 기획과 예산 편성에 반영하고 있다.

 정부가 낙관편견을 정책 결정 과정에서 떨쳐버리지 못하면 그 결과는 국민이 낸 혈세의 낭비다. 영국 정부는 지난해 10월 발표한 국방 감축안에 따라 다 만든 멀쩡한 비행기를 해체하고 있다. 해체 대상은 지난 10년간 40억 파운드(약 7조 1000억원)를 투입해 개발한 ‘님로드’(Nimrod MRA4)라는 신형 해상초계기다. 님로드는 고철로 처리하는 비용만도 2억 파운드나 소요된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님로드를 앞으로 10년간 운용하는 데 들어가는 200억 파운드의 비용을 절감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엄청난 돈이 투입됐어도 포기할 것은 과감하게 포기해야 한다는 ‘포기의 원칙’에 충실한 것은 미국 정부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2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추진한 ‘2020 달 재착륙 계획’을 백지화했다. 우리 돈으로 10조원이 넘는 90억 달러가 이미 투입됐고 백지화하는 데도 25억 달러가 들어가는 프로젝트였다.

 올해에도 오바마 대통령의 백지화 행보는 계속되고 있다. 16일에는 스텔스 전투기인 F-35의 대체 엔진 개발 계획을 백지화했다. 미국 역사상 가장 비싼 무기 개발 프로그램이었다. 개발사인 GE와 롤스로이스는 이미 30억 달러(약 3조3000억원)를 지출한 상태였다. 30억 달러는 지난해 북한-중국 간 무역 규모이자 삼성전자 TV 판매액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다. 대체 엔진을 완성하려면 20억~30억 달러가 더 필요했다. 중간쯤 갔지만 정부의 선택은 백지화였다.

 오바마 대통령이 사업 백지화로 웃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바마 대통령 자신이 백지화의 타깃이다. 그는 고속철도사업(HSR)에 540억 달러를 투입해 일자리 문제를 완화시킬 계획이었다. 그런데 플로리다주가 16일 탬파~마이애미 간 고속철도 사업을 사실상 백지화했다. 사업 거부로 정부 보조금 20억 달러와 2만3000개의 일자리가 날아갔지만 스콧 주지사의 입장은 단호했다. 단호함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스콧 주지사가 사업을 거부한 이유는 “고속철도 계획이 지나치게 낙관적”이라는 판단이었다.

 낙관편견 문제에서 우리나라는 영국이나 미국보다 더 취약하다. 우리 산업화의 역사는 곧 정부의 대형 국책 사업이 이룩한 승리와 성공의 역사로 볼 수 있다. 특히 야당이나 국민이 반대하더라도 역사는 대통령이 옳았다는 것을 입증했다는 믿음이 아직 남아 있다. 대통령들의 판단이 틀렸다는 사례가 누적되고 있지만 말이다.

 일부 지자체의 예산 낭비에 대해서 실상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수백억, 수천억원의 문제다. 그러나 새만금·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동남권 신공항 건설은 수조, 수십조원이 들어가는 초대형 프로젝트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북한 변수가 있다. 북한에서 돌발 상황이 전개되면 초대형 국책 사업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실패를 인정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이윤에 죽고 사는 기업마저도 제도화된 사업 진행 검증이나 사업 포기 절차를 구비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정부·기업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사업 백지화가 실패가 아니라 백지화하지 못하는 게 실패일 수 있다.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민간 격언은 포기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다시 생각해보면 이 격언은 늦었지만 백지화가 필요한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다.

김환영 중앙SUNDAY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