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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 논란’ 사라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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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헤럴드 제임스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 국제관계·역사학

세계화라는 단어는 1990년대에 처음 나왔으며 2000년 이후 널리 알려졌다. 2001년 프랑스 르몽드 신문은 세계화란 단어를 3500회 이상 사용했다. 그후 사용 빈도는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세계화의 의미가 퇴색돼 가고 있는 것이다.

 특정 단어가 과도하게 쓰였다가 점차 의미를 잃어가는 현상은 다른 역사적 사례와 비교해 보면 이해하기 쉽다. 20세기 들어 중요하게 거론된 용어 중에 ‘전체주의’와 ‘세계화’가 있다. 둘 다 이탈리아가 원조다. 두 단어는 본래 정치적으로 상대를 비판하기 위해 처음 사용됐다. 하지만 나중엔 비판에 쓰인 것만큼이나 해당 단어를 지지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자주 사용됐다.

 전체주의라는 용어는 1923년 이탈리아 무솔리니 정부를 ‘과대망상 정권’이라 비난하고 풍자했던 자유주의 작가 조반니 아멘도라가 처음 사용했다. 몇 년이 지나자 이탈리아 파시즘의 자부심이 담긴 단어로 변했다. 무솔리니 정권의 교육부 장관이자 파시즘 철학의 대부 조반리 젠틸레는 이 단어를 자랑스레 퍼뜨리기도 했다. 무솔리니가 직접 쓴(혹은 대필했을 수도 있는) 『파시즘 백과사전(Encyclopedia of Fascism)』에도 등장한다.

 ‘세계화’라는 단어는 유럽 대학생들의 과격하고 독창적인 언어 사용법에서 나왔다. 1970년 이탈리아 급진 좌파가 발행한 『시니스트라 프롤레타리아(좌익노동자·Sinistra Proletaria)』라는 정기간행물에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세계화’라는 기사가 실렸다. 기사는 IBM을 “이익을 내기 위한 경영을 총괄·조종하며 생산활동은 세계화하는 회사”라고 규정했다.

IBM 제품은 당시 14개국에서 생산돼 109개국에서 팔렸다. 이 기사는 이것을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세계화”라고 표현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급진 좌파 간행물이 최초로 현대적 의미의 세계화를 언급한 것이다.

 1990년대 세계화는 독설적이고 비판적인 의미로 많이 사용됐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 반세계화 시위가 유행처럼 번졌고 세계경제포럼(WEF)·세계무역기구(WTO)·국제통화기금(IMF)·맥도날드는 시위대의 표적이 됐다. 이 시기 세계화의 의미는 세계의 빈곤이 재벌과 엘리트 집단 때문이라는 1960년대 이탈리아 좌파들의 생각과 같았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달라졌다. 약간 긍정적 의미로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세계화의 주요 수혜자가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룬 제3 세계 개발도상국가들이었기 때문이다. 세계화 반대론자들도 환경·경제위기·빈곤 등 문제를 해결하는데 국제공조와 유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세계화’가 긍정적인 의미를 더했다.

 2011년 반세계화의 움직임이 크게 둔화됐고 세계화라는 단어는 무조건 반대나 지지해야 하는 것이 아닌 또 다른 무언가로 인식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다양한 주제와 영역이 서로 얽히고 설킨 인간사의 기본적 특성 때문으로 이해된다. 이제 세계화는 논쟁거리로서의 매력이 사라졌다.

헤럴드 제임스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 국제관계·역사학
정리=민동기 기자 ⓒProject Syndic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