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무상 시리즈는 ‘747 공약’ 같은 구호일 뿐”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국민참여당 새 대표로 유시민(52·사진) 참여정책연구원장이 사실상 확정됐다. 7일 당 대표 경선에 경쟁자 없이 단독 후보로 출마하면서다. 유 원장은 다음 달 12일 경남 김해에서 열릴 전당대회에서 대표로 취임할 예정이다. 그는 본격적인 정치활동에 들어가기에 앞서 중앙SUNDAY와 대표 출마 후 처음으로 언론 인터뷰를 했다. 10일 오후 파주출판단지에 있는 조그마한 집필실에서 그와 마주앉았다. 때론 격정적이고 때론 자기성찰적인 대화가 두 시간 반 동안 이어졌다.

마르크스주의로는 진지한 정치 불가능
-대표를 맡게 된 동기는.
“당이 아직 작지 않나. 당원이 4만5000명쯤. 그래도 지난해 6·2 지방선거 때 300명가량 출마해 10% 이상씩 지지를 받았다. 이제 겨우 일어서서 걸음마하는 수준이 됐는데, 당이 일을 좀 하려면 덩치도 커지고 뛰는 기술도 익혀야 한다. 그런데 뭘 알아야 좋아하든 말든 할 텐데, 아직 우리 당은 국민들이 잘 몰라서 싫어하지도 못하는 상태 같다(웃음). 당원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나부터 앞장서서 당을 알리라는 주문이 많았다.”

-책 쓰기에 한창인데 제목은 정했나.
“가제만 정해놨다. ‘우리에게 국가는 무엇인가’다. 다음 주까지 초고 끝내고 몇 주 더 퇴고 작업을 하면 4월에 책이 나올 것 같다.”

-지금 이 시점에 국가에 천착하는 이유는.
“2년 전 용산 참사가 계기가 됐다. 사람들 견해가 저마다 달랐는데 크게 네 갈래 반응이 있었다. 국가가 당연한 일을 했다, 해서는 안될 일을 했다, 국가란 원래 그런 거지, 그리고 국가가 일을 제대로 못했다까지. 이는 곧 국가주의·자유주의·마르크스주의·목적론적 국가론을 대변하고 있다. 이걸 접하면서 나는 어떤 국가론을 가져야 할 것인가, 나의 국가론은 확실한가, 정치인으로서 어떻게 국가를 바라보고 일해야 제대로 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이 커졌다.”

-개인적으로는 어느 쪽이었나.
“자유주의 국가론과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을 왔다 갔다 했던 것 같다. 민주화운동을 할 때는 나라가 잘못됐다고 하다가 사회경제적 평등과 노동권 문제가 등장했을 땐 마르크스주의로 갔다. 하도 문제가 안 풀리니까…. 국가는 소멸됨으로써 인간에게 봉사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정서적으로 와닿았던 것 같다. 솔직히 나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의 가장 큰 문제는 정치적 무기력이다. 국가에 냉담하고 정치에 냉소적인 정서로는 진지한 정치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역사를 보면 국가는 정의를 세우는 걸 목표로 하고 실제 그런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우리도 이제 이 흐름을 받아들일 때가 됐다. 자유주의와 목적론적 국가론의 결합을 통해 적극적으로 사회적 공동선을 추구하는 국가를 만들어가자는 게 내 생각이다.”

복지는 진보의 전유물이란 사고 버려야
-복지 논쟁이 한창이다. 복지란 무엇인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직면하는 삶의 여러 위험들을 사회적 연대를 통해 함께 극복해가는 게 복지다. 사회적 연대는 사회보험, 공적 부조, 보편적 서비스 등 세 가지 방식으로 이뤄져 왔다. 그런데 사회의 지불 능력이 커지고 국민의식도 바뀌면서 선별적 공적 부조 영역이 보편적 서비스로 점점 옮겨가는 추세다. 이게 많이 넘어간 나라가 복지국가다. 무상급식이 단적인 예다. 가난한 집 애들에게만 국가가 대신 밥값을 내주다가 전부 다 내주는 과정에서 발생한 첨예한 정치적 논쟁이 그것이다.”

-부자 급식 논란도 뜨겁다.
“참 갑갑한 게 재벌 손자에게 왜 공짜로 밥을 주느냐고 하는데, 그 재벌 할아버지가 세금을 엄청 많이 냈다. 그 돈으로 많은 아이들이 급식을 하는데 그 할아버지를 둔 손자에게 밥을 주면 왜 안 되나. 나는 이건희 회장 손자에게 공짜밥을 주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왜 그걸 나쁜 일이라고 하나. 그건 좋고 공평한 거다. 세금을 내는 건 징벌이 아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게 범죄가 아닌 것처럼. 우리는 세금을 많이 납부하는 건 명예로운 일임을 흔쾌히 인정해야 한다. 세금 많이 냈다고 손자 밥값을 따로 받는다면 그게 오히려 부자에 대한 징벌이다. 내가 부자라면 엄청 기분 나쁠 거다. 왜 오세훈 서울시장이 그런 주장을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학교 개·보수 등 달리 쓸 데도 많지 않나.
“그 말은 맞는데 부잣집 애들 뺀다고 그 돈 나오지 않는다. 또 그게 정말 걱정됐다면 부자감세를 하지 말았어야지. 20조원 깎아주곤 몇 백억원이 없다고 밥값을 받는 건 삽으로 퍼주고 숟가락으로 떠오는 거다. 생각이 때론 감옥이 될 수 있다.”

-민주당은 무상복지 시리즈를 내놨다.
“3무1반(무상급식·무상의료·무상보육·반값 대학등록금)이라고 덜컥 내놨는데 그건 구호일 뿐이다. 선거용 캐치프레이즈로는 의미 있을지 모르지만 정치인이 논의 자체를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 정책은 곧 정치다. 지금 야권이 겪고 있는 어려움의 근본은 신뢰의 위기다. 정책보다 더 중요한 게 신뢰다. 신뢰가 없으면 어떤 정책을 내놔도 국민이 안 믿어준다. 그런 상황에서 정책을 잘못 내면 신뢰는 더 깨진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진보·보수를 갈라치고, 원조 진보와 짝퉁·명품 진보를 나누는 게 아니다. 지금 야권은 선명성·선착순 경쟁으로 가고 있다. 무상의료 하는 데 8조원이 든다지만 아무리 들여다봐도 어떻게 계산을 뽑았는지 알 수가 없다. 이래서는 신뢰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의 사례를 들었다. “하토야마 정부가 서는 과정을 보면서 ‘역시 야당은 저렇게 뻥뻥 질러야 된다’는 말이 많았지만 나는 굉장히 불안했다. 저거 감당 못할 텐데, 공약 못 지킬 텐데 싶었다. 그렇게 선풍적 인기를 얻고 집권해 무엇을 바꿔놓았나 보면 역시 허무하다. 두렵다. 우리도 이명박 대통령처럼 747 공약(7% 성장, 국민소득 4만달러, 세계경제 7위 대국)이나 하게 될까 봐. 하루살이처럼 정치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길게 보고 국민의 신뢰를 다져가면서 국가를 운영할 생각을 해야지, 이명박 대통령 밑에서 못 살겠다며 똑같은 공약으로 오해받을 걸 내놓아서야 되겠나.”

-‘박근혜식 복지’는 어떻게 보나.
“지금 내놓은 게 사회보장기본법 전부 개정안 하나지 않나. 아직 개론서 수준이고 구체적 사업과 부수 예산이 나와 있지 않아 평가하기엔 이르다. 그리고 이젠 복지 담론이 진보세력의 전유물이란 사고는 버려야 한다. 독일도 비스마르크가 복지정책의 틀을 세우지 않았나. 우리나라도 대부분의 사회보험이 박정희·노태우 정부 때 도입됐다.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보수도 착한 일을 할 수 있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게 나뉘어져 있지 않다. 진보·보수의 경계선도 칼로 두부 자르듯 그어지는 게 아니다. 구체적인 정책으로 들어가면 넘나들게 돼 있다.”

야권연대, 누구라도 역량 발휘해주길
이쯤 해서 화제를 돌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유 원장에게 어떤 존재였나’. 거침없던 그가 말을 멈췄다.

“참,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 그게, 아….(손으로 눈을 비비며, 잠시 침묵하다가) 그냥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었죠. 정치인 이전에 인간적으로 아주 매력 있는 사람이었다.”

-이광재·안희정·김두관은 어떻게 다가오나.
“다 동지들이죠. 하지만 우리 정치 여건이 지금은 하나의 조직에서 한 팀으로 일하도록 허용하지 않는 것 같다. 어느 하나를 정답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면 서로의 판단을 존중하고 현실로 인정하자, 대체로 그렇게 돼 있다.”

-2012년 대선의 시대정신은 뭐라고 보나.
“시대정신이란 말은 너무 거창한 것 같다. 5년마다 시대정신이 바뀔 순 없지 않나. 모든 대통령 선거는 국민이 스스로 원하는 걸 갖는 선거다. 간절한 소망이 있을 땐 그 소망을, 절실한 욕구가 있을 땐 그 욕구를. 우리가 정권을 내준 건 국민의 요구에 맞춰갈 능력과 의지가 없었거나 그게 뭔지 잘 몰랐기 때문일 게다. 요즘 정권 교체를 원하는 분들이 늘고 있는데 야권연대를 못 이루면 어떡하나 두려운 마음이 크다. 나도 부족한 것 같으니까 딴 분이라도 역량을 발휘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 마음으로 서로 머리를 맞대고 신뢰를 쌓으며 대화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미 조금 늦은 감이 있다. 내가 이리 답답한데 유권자들은 오죽 그렇겠나.”
죽기 전에 ‘생전 장례식’ 꼭 할 것

-왜 정치를 하려고 했나.
“젊었을 때 국회에서 실무자로 일한 건 사회운동의 연장선이었다. 정치를 한 건 2002년 개혁당 때부터다. 그런데 저는 직업정치인으로서 책임의식이 별로 없었다. 노 대통령이 퇴임하면 나도 그만두고 빨리 집에 가서 하고 싶은 일 해야겠다는 마음만 컸다. 그러다 보니 불성실하고, 냉소적이고, 무책임해 보였던 게 사실이다. 동료 의원들이 저를 좀 불신하고 그랬던 게 이해가 된다. 나라도 그렇게 느꼈을 거다.”

-그런데 왜 다시 정치로 돌아왔나.
“대통령께서 돌아가시고 갑자기 대선후보 지지도 조사에 내가 들어갔는데 높게 나오니까 고민이 됐다. 숫자로 치면 400만 명쯤 되는데 왜 낙선한 정치인을 찍을까. 한 분 한 분이 다 주권자인데 자기를 대변해줄 정치세력을 못 찾고 있다는 건 비정상으로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 회피하는 게 맞는 걸까. 결국 이번엔 좀 더 진지하게, 책임의식을 가지고 해봐야겠다 싶었다.”

-국민참여당의 목표는 뭔가.
“우리 당은 정치 자체를 바꾸려는 꿈을 안고 있는 정당이다. 지역구도로 짜여져 있는 정당 지형이 불합리하고 국가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면 바꾸려고 시도해봐야 한다. 지역구도가 안 깨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게 가능하겠느냐고 물으면 당신이 안 하니까 안 되는 거라고 답하고 싶다. 못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안 해서 못하는 거다. 우리는 깨질 때까지 계속 도전할 거다.”

-지지도 측면에서 확장성 부족이란 지적에 대해서는.
“지금도 노력하고 있고 앞으로도 노력할 거다. 그걸 어떻게 보여줄 수 있겠나. 이렇게 바뀌었다고 광고하고 다닐 수도 없고. 실제로 그렇게 되면 저절로 보이겠죠. 시간이 좀 걸리지 않겠나. 그래도 요즘은 안티가 꽤 줄었다더라(웃음).”

-꿈이 있다면.
“죽기 전에 생전 장례식은 꼭 할 거다. 죽고 나면 문상을 와도 만날 수가 없지 않나. 아직 정신이 있을 때 인생의 동반자들을 초청해 손도 잡아보고 옛날 얘기도 나누고 선물도 주고받고 싶다.”

인터뷰를 마치고 인근 횟집에서 저녁식사를 함께했다. 미주구리회와 물곰탕을 시켰다. 장관 시절 일화를 얘기할 땐 웃음꽃이 폈다. 소주 2잔이 정량이라는 그는 막스 베버 부분을 마저 마무리해야 된다며 다시 집필실로 향했다. 만난 지 네 시간 반 만이었다.

파주=박신홍 기자 jbjean@joongang.co.kr

중앙SUNDAY 구독신청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