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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발전, 이젠 질로 승부 걸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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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한 승 희
지역발전위원회 기획단장

일본 홋카이도에 있는 유바리시는 파산한 지자체로 유명하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주력산업이었던 석탄산업이 쇠퇴하게 되자 이후 약 10년간 ‘탄광에서 관광으로’라는 기치하에 석탄박물관, 스키장, 리조트, 국제 영화제 등 20여 개의 대규모 관광프로젝트로 지역발전을 도모하고자 했다. 한동안은 잘나갔으나 관광시설에 과잉투자를 하는 바람에 우리 돈으로 4800억원이 넘는 빚만 남기고 파산했다.

 홋카이도의 또 다른 도시 오타루시의 전략은 좀 달랐다. 근대 개항도시 오타루시는 해산물과 농산물이 집중되는 물류 거점도시로서 유바리시와 마찬가지로 관광을 전략산업화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오타루는 새로운 관광시설 투자보다 오타루만의 차별화·특화 전략을 구사했다는 것이다. 이미 1910년대에 만들어 100년 넘게 보유해 온 운하와 1890년대 메이지 시대에 들어섰던 60여 동의 물류창고 등 근대 건축물을 재활용했다. 운하와 창고를 찻집이나 레스토랑으로 바꿔 100년 전의 흘러간 향수를 되찾는, 메이지 시대의 문화공간으로 재창조한 것이다. 지역발전에서 양(量) 대신 질(質)로써 승부한 대표적인 성공사례다.

 우리나라에도 질(質)로 승부하는 지자체들이 적지 않다. 이른바 ‘한국판 오타루’가 속속 출현하고 있어 희망적이다. 홋카이도의 오타루가 운하와 창고를 테마로 했다면, 전북 김제시는 호남평야의 지평선을 특화하고 있고, 전남 함평군과 보성군은 각각 나비와 녹차를 브랜드로 해 지역발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전북 김제시가 1999년부터 매년 10월 개최하는 ‘지평선 축제’는 우리나라 도작문화의 발상지인 벽골제와 국내 최대 곡창지대인 광활한 황금 들녘, 그리고 400리 코스모스길 등을 하나로 묶어 상품화했다. 땅을 파헤치고 콘크리트를 쏟아 붓는 개발보다 지평선-나비-녹차 등과 같은 내 고장 고유의 자원·문화·역사를 가지고 자기 지역 특유의 성장 동력과 미래 비전을 찾아낸 경우다.

 중앙정부 보조금에 목매는 지자체가 적지 않은 게 우리의 현실이다. 실패한 유바리를 반면교사로 삼고, 지역특성에 맞는 창조적인 지역발전 전략을 펼친 성공한 오타루의 지혜가 절실한 까닭이다. 새해에는 더 많은 ‘한국판 오타루’의 출현을 기대한다.

한승희 지역발전위원회 기획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