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한국판 ‘스푸트니크 모멘트’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양 선 희
온라인 편집국장

요즘 계속 머릿속에 맴도는 장면이 두 개 있다. 하나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국정연설에서 ‘Win the future(미래를 쟁취하자)’를 외치는 장면이다. 우리가 그 연설에서 ‘스푸트니크 순간:Sputnik moment’이라는 말에 홀려, 한국 교육을 치켜세운 수사학에 말려 놓쳤지만 그가 진정 하고자 했던 말은 바로 이거였다. 또 다른 하나는 일본 신용등급이 하락했다는데 “잘 모르겠다. 나는 그런 데 어둡다”고 말했다는 간 나오토 일본 총리의 멍한 반응이다. 이 둘은 별 관계가 없는 얘기다. 그런데 여기에 ‘한국의 미래’라는 문제를 대입해 보니 둘 다 걱정스러운 장면으로 이어졌다.

 먼저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 그는 툭하면 스푸트니크와 한국 교육의 우수성을 들먹이며 미국의 교육개혁을 부르짖는다. 스푸트니크는 러시아가 쏘아올린 세계 최초 인공위성인 동시에 미국 우주과학 개발과 교육개혁의 상징어다. 1957년 스푸트니크가 발사된 후 미국은 번개에 맞은 듯 교육개혁에 돌입했다. 당시 교육사조였던 존 듀이의 ‘진보주의 교육’은 미국 경쟁력 상실의 주범으로 몰렸다. 그리고 수월성 교육에 나섰다. 그 덕인지, 미국은 세계 초강대국이 됐다. 그들이 극복 대상으로 지목했던 러시아를 넘어선 건 물론이다.

 당시엔 스푸트니크 발사라는 구체적 상황이 있었다. 한데 지금은? 금융위기의 후유증과 중국의 부상과 같은, 일상적 위기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스푸트니크 순간’이라며 호들갑을 떤다. 그리고 ‘한국 교육’을 그들 교육개혁의 모델처럼 끌어다 붙인다. 그런데 오바마가 극찬하는 ‘훌륭한 한국 교육’은 알고 보면 애먼 소리다. ‘어떻게 잘 가르칠까’ ‘미래를 쟁취하는 교육은 무엇일까’의 고민은 우리 교육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강한 한국 교육’이란 미국이 교육개혁의 일념으로, 있지도 않은 위기를 조장하며 끌어다 붙인 ‘우상’, 즉 오늘날의 ‘스푸트니크’에 불과하다. 그래서 오바마의 극찬에도 불구하고 흐뭇하기보다는 영 찜찜하다. 우리 거대 시장인 미국이 ‘코리아’를 경계하게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다.

 다음은 일본의 추락. 과거 ‘일본의 현재’는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였다. 그래서 지난 세월, 일본이 잘하는 걸 우리가 따라잡는 경쟁을 무던히도 벌여와 두 나라는 산업구조도 수출구조도 겹친다. ‘일본이 하면 우리도 한다. 더 잘할 수 있다’는 오기가 우리 발전 동력의 한 축이었다는 건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 일본이 휘청댄다. 풍요와 복지정책에 국민의 오기와 근성이 사라지고, 집권 1년도 못 버티고 총리가 바뀌는 식의 리더십의 부재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그런데 관성 때문일까. 우리는 여전히 ‘일본의 길’로 간다. 야당은 ‘무상복지’를 외치면서 ‘애만 낳으면 나라가 먹여주고 키워주겠다”며 ‘복지병’을 부추긴다. 여당 대표는 수시로 개그맨 같은 실수담을 만들어내고, 임기 2년 남은 대통령을 향해선 ‘레임덕’을 들먹이며 흔들어 댄다. 이렇게 일본과 같은 길로 가다 우리도 나락에 직면할까 두려울 정도다.

 별 연결고리는 없어 보이지만, 이 두 장면을 끌어낸 이유는 이렇다. 둘 다 우리의 역할모델과 위상이 과거와 확 달라져야 한다는 걸 암시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과거 우리의 역할모델이었던 미국이 이젠 한국을 일정 부분에서 견제하고 극복하려고 한다. 또 한국의 역할 모델이었던 일본은 우리가 더 이상 따르면 안 되는 시점이 됐다. 어쩌면 우리는 앞으로 역할 모델이 없는 세월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 미래를 쟁취하기 위해선 전혀 새로운 로드맵을 짜 ‘마이 웨이’로 가야 할 때가 됐다는 것이다. 자! 이제 우리 정신을 번쩍 차리자.

양선희 온라인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