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클립] 중국 도시 이야기 <4> 황제의 도시 베이징(北京) (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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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4면

전통시대 베이징은 성과 문, 담의 도시였다. 하지만 오늘날 베이징을 찾는 관광객들은 과거의 성곽과 문을 찾아보기 힘들다. 베이핑(北平)에서 베이징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새로운 황제’로 불리는 마오쩌둥의 중화인민공화국 수도 건설 과정에서다. 신중국의 수도 베이징의 탄생과 현재의 모습을 살펴본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수도 건설작업

해자를 파면서 나온 흙으로 조성한 징산(景山)에서 바라본 눈 덮인 자금성. 신무문(神武門) 남쪽으로 천자를 상징하는 황금색 기와로 덮인 6개의 중심 궁전이 도열해 있다. [중앙포토]



신해혁명으로 ‘제경(帝京)’ 베이징 시대는 끝났다. 쑨원(孫文·손문)은 1912년 1월 1일 새로운 수도 난징(南京)에서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성립을 선포했다. 하지만 신해혁명의 과실은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가 앗아갔다. 그는 베이징을 떠나지 않았다. 베이징은 북양군벌 정부의 소재지가 됐다. 1928년 북벌에 성공한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난징을 수도로 국민당정부를 세웠다. 그 때까지의 베이징은 ‘구경(舊京)’ ’라오베이징(老北京)’으로 불렸다. 천하에 수도(京)는 하나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될 때까지 베이징은 정치의 중심에서 멀어진 채 쇠락한 북방의 고도(古都) 베이핑(北平)으로 전락했다. 1908년 베이징 성 안에 거주하던 인구는 70만5000명이었다. 봉록만으로 생활하는 사람이 전체 인구의 40%인 28만 명에 이르렀다. 생산 기능은 없는 거대한 소비도시였다.

1948년 가을 국공내전이 격화됐다. 린뱌오(林彪·임표)가 이끄는 70만 동북야전군은 랴오선(遼沈)전투에서 승리해 동북지방을 해방시켰다. 린뱌오는 녜룽전(<8076>榮臻·섭영진)의 화북야전군과 함께 100만 병력을 이끌고 베이핑과 톈진(天津)으로 밀고 내려왔다. 국민당 푸쭤이(傅作義·부작의) 장군이 베이핑 성 안에서 50만 병력으로 맞섰다. 문화계 인사들이 연일 푸 장군을 찾았다. 제국의 수많은 문화재를 포화로부터 지켜줄 것을 부탁했다. 근대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양계초)의 아들이자 칭화대 건축학부 량쓰청(梁思成) 학부장도 그중 한 명이었다. 고심을 거듭하던 푸 장군은 장제스를 버리고 49년 1월 22일 공산당에 투항했다. 마오쩌둥이 푸쭤이 장군을 만났다. “당신은 베이징의 큰 공신이다. 마땅히 천단(天壇)만 한 큰 상을 줘야겠다”라고 말했다. 푸 장군은 이후 신중국에서 수리부(水利部) 장관을 20년간 역임했다.

자금성을 중심으로 황성과 내성·외성으로 이뤄진 베이징시의 성곽 구조. 마오쩌둥의 묵인 하에 모두 철거됐다.

신중국이 세워진 후 베이징은 요(遼), 금(金), 원(元), 명(明)·청(淸) 왕조에 이어 다섯 번째로 대규모 수도 건설작업에 들어갔다. 량쓰청은 신베이징 도시 건설의 기획자가 됐다. 량과 같이 영국 유학파 건축가 천잔샹(陳占祥·진점상)도 합류했다. 1950년 베이징 성 서쪽에 60만 인구를 수용하는 새로운 행정중심도시를 만들고 보전된 옛 성과 연결하자는 ‘량천법안(梁陳法案)’을 제출했다. 량쓰청은 2차대전 말기 일본의 고도 나라(奈良)와 교토(京都)의 보호 문물 리스트를 미국에 제출해 폭격으로부터 지켜낸 경험이 있었다. 그는 행정 중심 신도시 건설의 사례로 미국의 수도 워싱턴시를 들었다. 베이징 성벽에는 입체적인 ‘공중 정원’을 조성하자고 제안했다. 한편, 사회주의 선진국 소련에서 한 무리의 도시계획 전문가들이 날아왔다. 그들은 국가급 행사, 군사 퍼레이드, 인민들의 행진이 이뤄져야 할 천안문 광장을 중심으로 수도를 조성하고, 4%에 불과한 베이징 노동자 계급을 모스크바 수준인 25%까지 늘리기 위한 공업 시설 건설을 제안했다. 1930년대 크렘린 궁을 중심으로 환상(環狀)으로 뻗어나가는 모스크바 방식의 사회주의 수도 건설을 제안한 것이다. 베이징의 재건을 주장한 소련 ‘해체파’는 량쓰청을 위시한 ‘보호파’에 ‘자산계급 사상’ ‘봉건 사상’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당시 베이징 시장이던 녜룽전이 마오에게 물었다. 마오는 공식적으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1953년8월 ‘당내의 자산계급 사상에 반대한다’는 문건을 발표했다. 사실상의 베이징성 해체 지시였다. 1954년 지안문(地安門)을 시작으로 성문과 성벽 해체가 시작됐다. 량쓰청은 당시 자금성 북쪽의 징산(景山) 12개와 맞먹는 1100만 t에 이르는 성벽의 체적으로 인해 완전 해체까지 83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이 해체에 필요한 노동력을 다른 생산적인 곳에 쓰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60년대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그의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인해전술로 밀어붙이는 마오쩌둥식 ‘인민전쟁’의 위력에 5~6년 만에 베이징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정양문과 덕승문의 전루(箭樓)와 동남각루 세 개만 남기고 44개의 성문이 사라졌다. 둘레 23㎞의 내성과 14㎞의 외성, 9㎞의 황성은 사라지고 대신 순환도로인 2환과 입체교차로가 들어섰다.

덩샤오핑 이후 국제화 … 4대 중심으로 재편

위성에서 본 자금성. 명·청대 24명의 황제가 거처하던 황궁으로 현대 중국에서는 고궁(故宮)으로 부른다.

신중국은 사회주의 건설 노선에 따라 베이징을 직장과 거주지가 통합된 단위(單位)조직으로 재편성했다. 작은 골목을 뜻하는 후퉁(胡同)은 쇠락하고, 대신 높은 벽 너머로 조성된 중국 특색의 커뮤니티인 ‘대원(大院)’이 들어섰다. 당·정부·군 소속의 각종 지휘 기관이나 대학·연구소·병원·국유기업 같은 기관들은 자신만의 대원을 만들었다. 각 대원 안에는 수천 명에서 수만 명에 이르는 구성원들이 거주했다. 강당·목욕탕·학교·우체국 등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편의시설을 갖춘 작은 도시가 속속 생겨났다. 화장장만 빼면 대원 안에 없는 것이 없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사회주의가 완성되고 복지의 천국이 도래한 듯했다. 중국의 다른 대도시들에도 국가 기관들의 대원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베이징처럼 커다란 대원이 밀집해 있는 도시는 다른 어느 도시에도 없었다.

개혁과 개방을 모토로 등장한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은 마오의 베이징을 탈바꿈시켰다. 여기에 국제화 물결이 밀려들었다. 우선 천안문을 가로지르는 베이징의 현대적 중축선인 창안제(長安街) 동쪽 건국문 밖에 CBD(Central Business District) 지역이 조성됐다. 4㎢의 면적에 중국중앙방송(CC-TV) 신청사와 국제무역센터를 비롯해 150~300m 높이의 마천루가 들어섰다. 베이징의 맨해튼이 조성된 것이다. 포춘 500에 드는 세계적 대기업 가운데 60여 사가 이곳에 진출했다. 다음으로 창안제 서쪽에는 금융가가 조성됐다. 재정부와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을 위시해 은행·증권·보험업감독관리위원회와 각종 금융회사가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원나라 시절 ‘금융방(坊)’으로 불리며 베이징 금융활동의 중심지였던 곳이 새롭게 재탄생한 것이다. 도심 북서쪽에는 베이징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중관촌(中關村)이 들어섰다. 베이징대, 칭화대, 인민대를 비롯해 중국과학원과 기업들의 연구개발(R&D) 센터가 자리잡았다. 한국의 용산과 같은 전자상가도 생겨났다. 베이징의 역사적 중축선인 용맥(龍脈) 정북쪽에는 냐오차오(鳥巢·새 둥지)로 불리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메인스타디움과 국가수영장 수이리팡(水立方)을 위시한 올림픽 공원이 자리잡았다. 올림픽을 기점으로 국제도시 베이징으로 비약하려는 그들의 꿈을 실현한 것이다.

지방 정부 연락사무소인 주징판, 비리·접대의 상징

청나라 당시 베이징에 과거시험이 열리면 매번 1만 명의 응시자가 몰려들었다. 이들은 내성 바깥 특히 선무문 남쪽에 밀집한 회관(會館)으로 모여들었다. 회관은 출세해 경관(京官)이 된 관리가 자신의 고향에서 상경해 온 선비들을 위해 만든 숙박시설이다. 민국 초 400여 개에 이르렀다. 현재 당시 회관의 기능을 하는 곳이 주징판(駐京辦)이다. 베이징 중앙정부의 동태를 살피고 중앙과 관련된 업무를 수월하게 처리하기 위해 각 지방정부와 기업들이 설치한 베이징 주재 연락사무실이다. 사무실과 호텔급 숙소를 겸비하고 있다. 약 5000여 곳으로 추정된다. 전체 주징판이 한 해에 쓰는 돈은 약 100억 위안(1조8000억원)으로 추정된다. 그 열 배를 쓴다는 설도 있다. 공산당은 비리와 접대의 온상이 된 주징판 개혁에 수차례 나섰다. 하지만 아직 성과를 거뒀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베이징은 단순한 관광도시가 아니다. 권력과 모략이 넘실거리는 권모술수의 요람이다. 한국인들은 ‘중앙’ 하면 좌우의 중심을 생각한다. 중국인들에게 ‘중앙’은 지방 위에 군림하는 권력의 중심을 떠올린다. 세계 ‘중앙의 나라’ 중국의 수도 베이징은 권위주의와 경제발전을 결합한 성장모델인 ‘베이징 컨센서스’의 본산이 됐다. 베이징 사람만이 중국의 표준어로 인정되는 말을 할 수 있고, 황제의 황궁과 제단을 공원으로 삼을 수 있다. 황제의 도시, 주징판의 도시, 세계의 중심으로 비약하는 베이징 여행의 묘미는 중국식 권력과 정치의 향내를 얼마나 맡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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