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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 대북정책조정관 PBS 긴급대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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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지난 5월 현직 관리로는 최고위층 인사인 윌리엄 페리 대북정책조정관이 나흘간 평양을 방문, 북한 수뇌부와 협상을 벌였다. 이후 미 의회에 제출한 ‘페리보고서’는 향후 미국의 대북 정책의 기조를 담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북 문제의 중심에 서 있는 윌리엄 페리 대북정책조정관과 미 공영방송 PBS 마거릿 워너 기자가 최근 나눈 밀도있는 대담.

지난해 8월말 북한의 ‘금창리 지하핵시설 의혹’이 제기되고 대포동1호 미사일이 발사되면서 동북아 지역은 물론이고 미국 내에서도 긴장이 증폭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 의회에서는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여론이 고조됐고 결국 클린턴 대통령은 의회와 조율을 거쳐 11월 윌리엄 페리 전국방장관을 대북정책조정관에 임명했다.

페리는 지난 5월 북한을 방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의장,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 등을 만나 한·미·일의 대북권고안 수용을 촉구했다. 그뒤 북한의 미사일 추가 재발사 움직임으로 고비를 맞기도 했지만 지난 9월12일 베를린 북·미 회담에서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 중단에 합의했다. 그리고 사흘 뒤 북한의 핵무기 개발계획을 중지시키기 위해 ‘현저하게 더 빠른 속도로’ 북한과의 외교·무역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페리보고서’가 미 의회에 제출됐다. 이어 17일 마침내 클린턴 행정부는 대북(對北)
제재 완화조치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보고서 제출 이후 윌리엄 페리 대북정책조정관은 지금까지 진행돼 온 대북협상 과정과 향후 전망에 관해 미 공영방송 PBS의 마거릿 워너 기자와 대담을 가졌다. 다음은 회견 내용.

워너 : 미국은 약 50년 동안 대북 제재조치를 계속 유지해 왔다. 제재를 이제야 해제하는 이유는?

페리 : 지난 50년간 우리는 평화가 아니라 정전(停戰)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무장체제하의 정전으로 5년 전 군사적 충돌이 야기될 뻔했다. 당시 사태는 아무 탈 없이 해결된 데다 잠재적 충돌 가능성 역시 미·북 기본합의문으로 해소됐다. 그것은 핵무기와 관련된 것이었다.

워너 : 그것은 1994년 제네바협정으로 알고 있는데….

페리 : 그렇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 동결과 관련된 것이다. 지난 1년 사이 미사일 발사를 둘러싸고 새로운 위기가 고조돼 왔다. 과정은 매우 극적으로 전개됐다. 지난 8월 일본 열도를 가로질러 발사된 장거리 미사일 때문이다. 북한이 인공위성을 발사하려다 실패한 것이지만 일본 열도를 가로지를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이 사용됐다. 그 결과 동북아에 다시 긴장이 고조됐다. 새로운 위기였던 것이다. 우리는 위기 해법을 최우선 과제로 모색중이다.

워너 : 미국의 안보, 아니 미 동맹국들의 안보라는 측면에서 어떤 변화가 도출되지 않을 경우 북한은 과연 얼마나 심각한 위협, 얼마나 심각한 안보위협이 될 수 있겠는가.

페리 : 북한은 병력 1백만명 이상을 실전배치해 놓고 있다. 북한 병력 가운데 3분의 2가 휴전선 인근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가공할 군사적 위협이다. 지난 수십년 동안 그의 반 정도에 불과한 한·미 연합 병력이 그들을 억지해 왔다. 핵무기나 미사일이 개입되지만 않는다면 억지력은 계속 유지될 것이다. 우리가 북한으로 하여금 핵·핵무기·미사일을 보유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데 역점을 두고 있는 것도 그런 억지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워너 : 북한은 제재 완화의 대가로 장거리 미사일을 동결하거나 시험발사하지 않는다는 데 합의했다. 북한이 합의를 준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페리 : 그것은 좀더 폭넓은 합의에 이르기 위한 조그만 한단계에 불과하다. 미사일 시험발사 중단과 제재 완화라는 이번 특별 단계는 미국과 북한 모두 각각 철회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 자리를 빌려 말하고 싶은 것은 미국은 북한에 대한 불신이 깊다는 점이다. 반대로 북한도 미국에 대한 불신이 높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포괄적 합의를 염두에 두고 있다. 그것은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일괄타결을 둘러싸고 협상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현재 한번에 하나씩 협상을 진행중이다. 우리가 긍정적인 조치를 취하고 북한이 긍정적 조치로 화답해 온다면 충분한 신뢰가 구축돼 협상을 한단계씩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워너 : 북한이 그렇게 미미한 첫 단계조차 준수하지 않는다면?

페리 : 그럴 경우에 대비해 우리는 두 개의 대안을 마련해 놓았다. 이번 보고서는 빌 클린턴 대통령과 의회에 제출됐다. 우리가 선호하는 첫째 대안은 대북 관계 정상화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이번 합의는 미·북 관계 정상화 도정의 조그만 첫 단계가 될 것이다. 북한이 그 길로 나아가려 들지 않는다면, 행동으로 그럴 의사가 없음을 밝힌다면, 우리의 안보이익 수호를 위해 모종의 행동에 나서야 한다.

워너 : 예를 들면?

페리 : 상세히 밝힐 수 없다. 아니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지난 94년 6월 상황으로 돌아가게 되리라는 점만은 분명히 밝히고 싶다. 당시 상황은 위험한 군사적 위기에 해당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런 상황을 피하고 싶다는 점이다.

워너 : 94년 당시 미국이 하루만에 동북아로 미군을 증파하고 전쟁으로 치달을 수 있는 강력한 제재를 가하고 있었다고 말한 것으로 안다. 지금 발언이 바로 그런 것인가.

페리 : 아니다. 당시 우리가 맞닥뜨린 특정 위협에 대한 대응법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새로운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면 그에 맞는 특별 대응법을 구사하게 될 것이다. 그것에 대해 상세히 밝힐 수는 없다. 밝히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군사·정치·경제 등과 관련해 우리에게 많은 대안이 있다는 점이다.

워너 : 이번 합의문 내용을 명확히 밝혀 달라. 북한이 이번 합의로 무기, 다시 말해 미사일 개발을 계속하거나 미사일 혹은 핵기술 판매에서 손을 떼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아닌 듯싶은데….

페리 : 이번의 첫 단계는 오로지 미사일 시험발사 유예와 관련된 것이다. 북한이 이번 합의를 준수할 경우 이른바 미사일기술통제협정(MTCR)
에 따르게 될 전망이다. 그 결과 미사일 시험발사·개발·생산·수출에도 제한받게 될 것이다. 현재 그런 단계에 이른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그런 단계까지 나아가게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워너 : 아다시피 94년 제네바 협정과 이번 합의 모두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다. 근본적으로 미국이 이른바 일련의 공갈협박에 걸려들었다는 것이다. 북한이 위협을 가하면 우리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북한에 돈을 건네준다는 말이다. 그 뒤 북한이 새로운 위협을 다시 들고나오면 우리는 또 돈으로 무마한다. 그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북한의 그런 행동에 상까지 줘야 하는가.

◇베트남처럼 북한과 관계 정상화가 목표

페리 : 미사일 관련 제안에 대해 한번 살펴보자. 우리, 아니 나는 지금 이번의 조그만 한 단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의 미미한 단계, 다시 말해 우리의 행동은 바로 대북 제재 완화이지 매수가 아니다. 이번 단계는 미·북 사이에 소비재 교역을 허용하는 것으로 양측 관계 가운데 하나를 정상화하는 일에 불과하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양측 관계, 양측 외교·경제 관계의 전면 정상화로 이어질 첫 단계이지 매수가 아니다. 그것은 관계 정상화를 향한 조그만 하나의 발판일 뿐이다.

워너 : 북한이 근본적으로 도발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뜻인가.

페리 : 북한이 그런 단계들을 밟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대북 관계 정상화를 모색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관계 정상화로부터 한발 물러서 있는 것은 현존하는 위협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북한에 위협을 제거할 경우, 우리는 물론 북한도 관계정상화로 한발 더 나아갈 수 있으며 양측 모두 안전을 확보하고 이익을 얻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나는 양측은 물론 동북아 지역 모든 국가에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 역시 우리 못지않게 그 점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게 분명하다. 게다가 한국과 일본은 이번 연구·제안 과정에서 우리의 완벽한 동반자 역할을 해줬다.

워너 : 이번의 제안·결론·권고안에서 비교적 포괄적인 접근법을 제시한 것으로 알고 있다. 진짜 구상은 무엇인가. 미·북 관계의 전면 정상화인가. 그렇다면 그것이 양측에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보는가.

페리 :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관계 정상화다. 대베트남 관계를 예로 들어 보자. 10∼20년 전만 해도 대베트남 관계 정상화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날 정상화가 실현됐다. 외교 사절단 수준의 관계가 아니라 정상적인 대사 관계인 것이다. 교역 관계의 정상화도 이뤄졌다. 북한과도 그런 관계가 성립되기를 바란다.

워너 : “우리가 압력을 가하기만 하면 북한 정권이 곧 붕괴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말한 적이 있지 않은가.

페리 : 그렇다.

워너 : 어떻게 해서 그런 결론에 이르렀는가.

페리 : 북한 문제 전문가들은 북한이 현재의 심각한 경제위기로부터 벗어나게 되리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지금까지 기아 사망자는 수십만명에 이른다. 아니 1백만명을 웃돌지도 모른다.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관측통들이 북한 정권 붕괴 운운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북한을 상대할 필요없이 붕괴할 때까지 기다리자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주장에 의존할 수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북한 정권은 매우 강한 통제력을 발휘하고 있다. 북한 정권을 용인하거나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북한 정권의 통제력이 매우 강하다는 것만은 인정하자는 것이다. 북한 정권이 곧 붕괴하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우리가 바라는 북한 정권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북한 정권과 상대해야 한다.

워너 : 그렇다면 북한을 어떻게 알게 됐고 협상과정은 어땠는가. 전·현직을 불문하고 북한에 직접 들어가 이번 같은 수준의 협상을 벌인 최고위 관리 아닌가.

페리 : 대북 협상 관련 서적을 몇 권 읽었다. 협상 경험이 있는 당국자들로부터 조언도 구했다. 이번 협상에서 논쟁과 격분을 예상했으나 그런 것은 전혀 없었다. 나는 강석주(姜錫柱)
북한 외무성 제1부상과 네차례 회담을 가졌다. 회담은 매번 서너 시간 동안 지속됐다. 따라서 오랫동안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대화는 솔직하고 심도있게 진행됐다. 논쟁은 전혀 없었으며 대화는 건설적이었다. 우리는 많은 문제에 대해 이견을 드러냈지만 대화는 매우 진지하고 솔직했다.

워너 : 북한의 장기적인 진짜 목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정녕 대미(對美)
직접대화를 원하는가.

페리 : 내가 방북한 주요 목적은 북한이 대미 관계 정상화에 진정 관심을 갖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그 점에 대해 북한에서는 상당한 긴장과 이견이 존재하지만 그들이 대미 관계 정상화를 바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문제는 북한이 대미 관계 정상화를 위해 미사일 계획까지 포기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북한은 그것이 대미 관계 정상화의 걸림돌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워너 : 미사일·무기 프로그램이 얼마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아다시피 북한이 미사일을 개발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유리한 교섭 수단을 확보하기 위함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북·미 관계정상화와 동북아 안정을 위해서는 남북대화가 필수

페리 : 그렇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북한은 진짜 미사일 개발 계획, 심각한 미사일 개발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허풍이 아니다. 북한이 미사일 개발 계획을 필요로 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주된 이유는 안보·억지력이다. 억지 대상은 바로 미국이다.
우리는 북한에 위협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북한은 우리를 위협으로 간주하는 것이 분명하다. 북한이 미사일을 하나의 억지력으로 보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게다가 북한은 다른 나라들에 미사일을 판매함으로써 외화까지 벌어 들이고 있다. 확신하건대 외화벌이는 하찮은 요인은 아니지만 주요 요인도 아니다.

워너 : 앞서 말한 바 있듯 양측 사이에는 뿌리 깊은 불신이 가로 놓여 있다. 그러나 많은 미국인이 갖고 있는 북한 사람들에 대한 인상은 그들이 상궤를 벗어난 데다 의심 많고 편집광적이며 믿지 못할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사람들과 거래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는가.

페리 : 앞서 말했듯 그들과 나눈 대화는 모두 솔직하고 건설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완고했다. 우리는 많은 문제에서 서로 이견을 드러냈지만 대화는 솔직하고 건설적이었다. 그들은 상궤를 벗어나거나 비합리적인 사람들이 결코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매우 논리적이며 이론적이다. 우리는 그들의 이론, 그들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을 비논리적인 사람들로 간주하게 된 것이다.

워너 : 첫 단계만 놓고 볼 때 북한이 말과 행동에서 일부 도발적인 조치를 완화하리라고, 아울러 그들이 한국과 이따금 직접 대면하리라고 생각하는가.

페리 : 우리가 첫 단계에서 얻어낸 것이 미사일 시험발사 중단밖에 없다면 그것은 실패작이다. 우리의 바람은 이번 첫 단계가 대미 관계 정상화 뿐 아니라 동북아 긴장완화를 위한 첫 발판이었으면 하는 점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다시 말하지만 궁극적으로 매우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남북대화가 수반돼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성공한 것이 아니다. 바라건대 이번 단계를 계기로 남북대화가 촉진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워너 : 그렇다면 어떤 약속도 없었다는 말인가. 그러니까 그런 유의 적개심이 악화된다 해도 결코 놀라지 않을 것이라는 뜻인가.

페리 : 앞으로 갈 길이 멀다. 게다가 앞길에 실로 많은 장애물이 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40년이 넘도록 우리는 머리 위를 맴도는 먹구름처럼 한반도를 덮고 있는 전쟁의 위협과 함께 살아왔다. 먹구름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바람에 밀려 흩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먹구름이 흩어져 사라지는 첫 단계를 목도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바라고 염원하는 것이 바로 그 점이다.

글 : PBS 마거릿 워너 기자
월간중앙(http://win.joongang.co.kr) 제 288호 1999.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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