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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산업화·민주화 … 근현대 영욕 지켜본 서울의 관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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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호 19면

서울역은 어딘가로 떠나고 누군가를 맞이하는 이별과 만남의 교차점이다. 또한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가는 중간역이다. 사진은 지난 2일 설날을 하루 앞둔 신·구 역사의 모습. 신동연 기자

서울역은 한국 근현대사의 창(窓)이다. 원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한 채 확장을 거듭해온 역사(驛舍)에는 당대의 사회상이 반영된, 사람 사는 이야기들이 묻어 있다. 서울내기건 서울의 꿈을 찾아온 시골뜨기건 서울역과 광장에 얽힌 추억 하나쯤 갖지 않은 이가 어디 있으랴. 집을 떠나 평행선 위를 미끄러지다 만난 낯선 세계에는 두려움과 설렘이 가득했다. 도착과 출발의 교차점은 늘 현기증이 일 만큼 부산했고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그 사건들과 씨줄·날줄로 엮인 개인사에는 저마다 속 깊은 사연들이 배어 있다. 생생한 뉴스의 현장, 서울역은 그래서 블로그나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곤 한다.

사색이 머무는 공간 <55> 서울역

설 연휴 기간인 4일 입춘 꼭두새벽, 서울역은 한적했다. 귀성객들과 민심을 잡으려는 정치인들로 붐볐던 대합실과 플랫폼에는 몇몇 여행자들이 서성일 뿐이고 딱히 돌아갈 곳이 없어 낙엽처럼 뒹구는 사람들이 간간이 보였다. 겨우내 칼날을 세웠던 혹한의 일기는 피부에 와닿게 풀려 있었다. 문득 곽재구 시인의 시 한 소절이 저절로 입가에 맴돌았다.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열차가 정차하고 승객들이 타고 내리는 장소인 철도역은 병원·학교·은행·백화점 등과 함께 출현한 근대시설이다. 수도 서울의 심장부에 위치한 서울역에는 숱한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고 산업화·민주화를 이룩한 이 땅 사람들의 발자취가 궤도처럼 깔려 있다. 거대 도시의 관문인 서울역 광장으로 내딛는 첫발은 꿈과 도전을 향한 질주로 이어졌다. 많은 이들이 땀 흘려 일하고 공부해 저마다 눈부신 성취를 이뤘고 금의환향하기 위해 다시 서울역을 찾았다.

귀성길, 그들의 양손에는 선물꾸러미가 그득했다. 그 속에는 드라마 같은 성공담도 서리서리 개켜져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양지에 설 수만 없는 게 세상살이다. 누군가는 서울에서 좌절을 겪었고 누군가는 서울역 주변을 떠도는 신세로 전락했다.

舊역사는 가장 빼어난 일제시대 건축물
서울역은 종착역이자 시발역이다. 한국의 모든 철로는 서울역으로 통한다. 해방 그리고 분단 뒤 북으로 가는 철길은 막혔다. 하지만 서울역은 원래 남으로 일본을 향하고 북으로 만주와 바이칼 너머까지 이어진, 남과 북 사이의 철의 실크로드에 놓인 국제선의 중간역이었다. 자동차 산업이 지금처럼 발전하기 전까지 철도는 육상교통의 왕자였다.

인류사에서 근대는 공간과 시간을 좁히고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가능케 한 열차의 등장으로부터 시작됐다. 값싸고 신속한 운송수단은 산업화를 앞당겼다. 하나의 소비구조로 연결된 사람들은 일정한 구역 안에서 일체감을 형성했다. 근대적 의미의 민족이나 국민국가의 등장도 철도·열차 덕이다. 전깃줄이 산업국가의 신경선이라면 철로는 피를 돌게 하는 동맥이다. 그 동맥을 우리 스스로 만들지 못하고 외세의 힘에 의존했던 근대의 불행이 경인선(1899년 개통), 경부선(1905년), 경의선(1906년), 호남선(1914) 등에 침목(枕木)처럼 고여 있다.

서울에 증기기관차가 등장한 것은 1899년이다. 9월 18일 오전 9시, 노량진에서 미국제 ‘모걸(mogul) 탱크형(形)’ 증기기관차가 엄청난 굉음을 내며 제물포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경인선 열차의 첫 운행 순간이었다. 이날은 철도의 날로 기념된다.

1896년 고종은 미국인 모스(J. R. Morse)에게 경인철도 부설권을 허가한다. 모스는 1897년 3월 29일 인천 우각현(牛角峴)에서 기공식을 올리지만 자금난으로 곧 공사를 중단한다. 그 후 일본 정부가 중심이 된 경인철도회사가 부설권을 인수해 제물포∼노량진 구간 33.2㎞를 개통했다. 이로써 ‘인천에 상륙한 근대 문명’이 레일을 타고 서울로 몰려오기 시작한다.

1900년 7월 5일 한강철교가 준공되면서 7월 8일 노량진∼경성역 구간이 연결되었다. 당시 경성역은 현재 서울역 자리가 아니라 이화여고 근처 서대문역이었다. 지금의 서울역에는 목조건물로 된 남대문정거장이 있었는데, 1900년 경부선의 역사로 개설된 것이다. 이 남대문정거장은 1923년 1월 1일 경성역으로 바뀐다. 당시 일본은 한국 철도를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 위탁경영하게 했다. 한국과 만주를 하나로 묶어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1925년 경성역사를 준공하면서 오늘날의 구(舊)서울역사 업무가 시작됐다. 광복 후 47년 11월 1일 경성역은 서울역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2004년 4월 1일 신(新) 서울역사로 이전하기까지 78년여간 수도 서울의 관문 역할을 해왔다.

서울이 4대문 안을 벗어나지 않고 말이나 수레가 교통수단이던 시절에 등장한 철마(鐵馬)는 근대 조선인들의 사유 폭과 풍경의 개념을 바꿨다. 공간이 좁혀졌고 표준시가 정해졌다. 일본보다 30분 늦고 중국보다 30분 빠른 한국 표준시가 1908년 4월부터 1911년 말까지 시행되었다. 바람이나 소·말 혹은 인력에 의존하던 탈것을 기관차가 대신하게 됨에 따라 자연적인 풍경도 상업화됐다. 차창 밖으로 내달리는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일부러 값비싼 열차를 타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같은 풍경은 이내 식상해지기 마련이다. 낯선 사람들과 멀거니 마주앉아 있는 것도 민망하고 따분한 노릇이다. 열차 안에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문고판 추리소설과 연애소설, 잡지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소리 내어 읽던 오래된 낭독습관이 묵독(<9ED9>讀)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독서습관으로 변해갔다. 그러면서 차차 개인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옛 서울역사는 철골구조인 신 서울역사와 사뭇 다른 건축양식이다. 바로크·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된 이 붉은 벽돌 건물은 한번만 봐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만큼 인상적이다. 별 특징 없는 도심의 빌딩숲 사이에 독특한 중앙 돔을 이고 서 있는 이 이색적인 건물은 미적으로도 빼어나다. “현재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 건축물 가운데 가장 뛰어난 외관을 갖고 있는 건물입니다. 붉은 벽돌 틈에 흰색의 화강석으로 수평 띠를 두르고 벽면 모서리에 귓돌을 설치해 변화감을 유도하고 있지요. 서울역사는 단위 건축물로서가 아니라 도시공간과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성장해온 시설입니다. 지난 100년에 그랬듯 미래 100년에도 그렇겠지요.”

신예경(33) 남서울대 건축공학과 교수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인 ‘20세기 서울역사의 도시공간적 변모’에서 서울역 변천사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유라시아 대륙으로 鐵馬 달릴 날 기다려
옛 서울역사에는 요즘 가림막이 쳐져 있다.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나기 위해 새로 단장하기 위해서다. 가림막에는 대한민국 근현대를 상징하는 사진들이 내걸렸다. 모두 서울역사를 배경으로 포착한 역사적인 순간들이다. 8·15 해방을 맞아 군중은 서울역 광장에 몰려나와 플래카드를 들고 환호했다. 53년 휴전 직후 살기 위해 무작정 상경하는 가족사진에서 아버지는 밥상을 걸머졌고 두 아이들은 혹시 서로를 잃어버릴까봐 손을 꼭 부여잡았다. 61년 5월 16일 새벽에는 군인들이 서울역 광장의 행인들을 통제했다. 71년 3월 30일에는 밤늦게 서울역에 내린 시골처녀를 부녀보호소 직원들이 안내하고 있다. 윤락가로 팔려가는 사건이 잦았기 때문이다. 80년 5월에는 서울 시내 35개 대학 학생들이 역 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어 ‘서울의 봄’을 연출했다.

예나 지금이나 명절 때면 귀성길은 혼잡하다. 70∼80년대에는 87명 정원인 3등 객차에 230여 명이 승차해 콩나물 시루 같은 풍경을 연출했다. 그럴 때 선반은 더 없이 좋은 침상이 됐다.
한 장의 뜻깊은 사진은 한 시대를 잘 요약하는 스펙트럼이다. 구구절절한 말이나 글보다 메시지가 더 선명하다. 공사가 끝나면 복합문화공간이나 새 역사 어딘가에 상설 전시를 한다면 여행객들이 자연스레 역사의 숨결을 호흡할 수 있지 않을까. 자투리 시간을 가질 여행자에 대한 배려도 필요하다.

서울역 광장에선 오래 전 암표상과 소매치기들이 활개를 쳤다. 물론 무임승차도 많았다. 그런데 2009년 9월부터 서울역 등 전국 주요 역 개찰구의 자동 개·집표기와 검표원을 없앴다. 그래도 무임승차는 늘지 않았다고 한다. 인터넷 예매문화가 정착된 오늘날 암표상은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렸고 소매치기 대신 성추행 사건들이 늘고 있다. IMF 외환위기 이후에는 노숙인이 늘어났다.

“혹독하게 추웠던 이번 겨울에 서울역 노숙인들이 날씨 따뜻한 부산역으로 많이 내려갔습니다. 꼬지(‘구걸’을 뜻하는 은어)로 돈을 모아 표를 산 것이죠. 봉사단체에서 세 끼 식사를 제공하고 응급치료를 해주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합니다. 역시 정부가 나서서 자활프로그램을 실시해야겠죠. 종교단체는 그저 보완 수준입니다. 우리 모두 조금만 더 낮아지고, 조금만 더 작아지면 서울역 주변 노숙인과 쪽방촌 거주자 2000여 명이 함께 살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요?” ‘2011 설날사랑큰잔치’를 연 한국교회희망봉사단 사무총장 김종성(55) 목사는 4일 새벽 이른 시간임에도 생기가 넘쳤다.

철도는 근대의 한 상징이다. 그 상징의 초창기 주체가 일본이었다는 게 우리 역사의 아픔이다. 남북 분단은 서울역을 남과 북 사이 통과역이 아닌 종착역으로 만들었다. 철도가 단절된 북방은 우리 앞에 역사적 사명으로 남아있다. 봄이 오는 새벽, 한국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공간 서울역에서 육로로 유라시아 대륙을 달리는 날을 소망한다. 그전까지 우리는 육상교통의 섬 시대를 사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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