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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인터뷰 | 6共 북방정책 입안했던 박철언 전 체육청소년부 장관

중앙일보

입력

월간중앙남북관계가 교착 상태에 빠진 가운데 북한은 신년 들어 대화 공세를 펼친다.
전쟁 일보 직전에서 내민 적의 손을 잡을 것인지, 뿌리칠 것인지 우리 정부는 고민 중이다.
지금보다 남북관계가 더 험악했던 5, 6공 당시 대북정책을 이끌었던 박철언 전 체육청소년부 장관은 북한뿐만 아니라 중국도 적극 끌어안아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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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공화국의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69) 전 체육청 소년부 장관. 전성기 때는 최고 실세이자 북방정책의 입안자로서 숱한 화제를 뿌리다 정권이 바뀌면서 감옥으로 직행하는 등 단연 시대의 ‘뉴스메이커’였다. 2000년 정계를 은퇴한 지난 10년 동안 간간이 뉴스에 등장해 국민들로 하여금 야릇한 ‘향수’와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 현 정부 들어 남북관계가 꼬이고부터는 그가 열정적으로 추진한 북방정책이 새삼 조명을 받는다.

'정부, 100년 전 친청파 닮아 MB는 美와 핵 담판 해야' #현 정부는 중국 몰라도 너무 몰라… 北 붕괴하면 親중국 괴뢰정부 설 것 #'통일이 중국 국익에 이익' 느낌 심어야… 국방 허술한데 北과 감정싸움 왜 하나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다음날인 지난해 11월 24일 민주당 정동영 최고위원은 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일러 “최소한 노태우 정권 시절만큼이라도 돌아가야 한다”고 촉구했다. 정 최고위원은 “이명박 정부가 김대중 정권, 노무현 정권의 대북정책이 정 싫다면 노태우 정권의 북방외교 정신이라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뉴스위크>도 천안함 침몰 직후인 지난해 4월 “노태우대통령의 북방정책과 그가 벤치마킹한 독일의 동방정책(Ostpolitik)을 배워야 한다”며 새로운 북방정책의 필요성을 제기한 바 있다.

5, 6공 두 정부에서 모두 42차례의 남북 비밀회담 수석대표로 참석했던 박 전 장관은 분명 남북관계에 관해 발언권이 있다고 하겠다. 그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이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며 “100년 전 망국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등 쓴소리를 쏟아낸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질긴 악연도 이어간다. 2005년 펴낸 자서전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서 1990년 3당 합당을 앞두고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가 노태우 대통령에게서 받은 돈이 40억원이 넘는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2008년에는 178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모 대학의 여교수를 고소하고, 손해배상 소송도 내면서 세상은 다시 그를 떠올렸다.

올해 69세인 그에게는 96세의 노모가 있다. 막내 동생과 함께 대구에 사는 노모를 뵈러 주말마다 어김없이 대구를 찾는다. 노모는 아들이 좋아하는 군고구마와 갈치구이를 직접 장만한다. 노모는 상경하는 아들을 동대구역까지 나와 배웅할 정도로 각별한 애정을 쏟는다. 그는 야인으로 돌아간 뒤에도 시를 쓰고, 대학에서 강의를 5년 째 하는가 하면 변호사 사무실을 내는 등(서울대 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검사장 출신이다) 1인 다역을 소화한다.

1월 초 서울 역삼동 변호사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현 정부 대북정책에 대한 평가와 어찌 보면 롤러코스터와도 같은 그의 인생사를 함께 들었다.

거꾸로 가는 정부의 대북정책
천안함 침몰에 이어 연평도 포격 도발로 남북관계는 거의 벼랑 끝에 와 있다. 박 전 장관은 나라의 미래를 위해, 특히 남북관계의 올바른 진전을 위해 인터뷰에 응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이명박 정부의 안보·외교정책이 굉장히 불안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질타했다.

―요즘 남북관계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안개 속을 걷고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올 신년사에서 확고한 국가 안보와 지속적인 경제 활성화에 역점을 두겠다고 밝혔습니다. 안보태세를 다시 성찰하고 전면 재정비함과 동시에 5%의 경제 성장을 추구한다는 방향은 맞습니다만 안보와 경제의 대전제인 대북정책은 잘못 가고 있어 걱정입니다. 북한의 도발에 강력히 응징한다는 안보태세만 강조할 뿐 도대체 대북정책을 어떻게 이끌겠다는 구상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북정책이 제대로 서지 않으면 경제와 안보 양쪽에서 치명적인 문제를 야기합니다. 이명박 정부는 외교·안보정책의 첫 단추를 잘못 끼웠고, 지금도 바로잡을 조짐이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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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단추라는 게 뭘 뜻하는 건지요?
“현 정부 출범 초기의 대북정책인 ‘비핵·개방·3000’ 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방을 하면 1인당 국민소득 3000달러가 되도록 남한이 도와준다는 내용인데 이는 북한정권의 속성도 모르고, 또 그들의 자존심을 굉장히 손상시키는 정책입니다. 개방하면 무너진다고 생각하는 정권에 개방하라? 우리 말 잘 들으면 1인당 국민소득 3000달러 되도록 해준다? 자존심 하나로 버티는 나라에 마치 거지 동냥 주듯, 우리 말 잘 듣고 쌀과 비료가 필요하다고 요청하면 검토해보고 주겠다는 식의 접근인데 현실에서 먹히지 않습니다. 그나마 대북정책도 오락가락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정부 정책에 혼선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지난해 이 대통령의 8·15 경축사를 봅시다. 이 대통령은 통일이 반드시 온다며 통일세 등 현실적인 방안도 준비해야 할 때가 됐다고 했습니다. 이는 북한이 급격하게 붕괴될 조짐이 있으며 북한이 붕괴되면 당연히 우리가 흡수하는 통일이 되지 않겠느냐, 그러자면 북한을 먹여 살리고 재건할 통일세를 준비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그런데 지난해 말 통일부 업무 보고에서는 평화통일을 해야 한다, 절대 흡수통일을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나아가 북한이 중국 식으로 발전하기를 기대한다고 했습니다. 대통령의 말에도 분명 혼선이 있습니다. 이는 통일부가 시종 대북정책 기조를 잘못 잡은 탓입니다. 지금 이나라는 위기입니다. 현 정부의 외교·안보 라인에 있는 분들의 철학과 세계관으로는 당면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북정책뿐만 아니라 현실인식도 안이합니다. 통일장관을 교체해야 한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점에서 문제가 됩니까?
“한국의 외교·안보 라인은 한국이 북한을 흡수통일해도 중국이 반대하지 않을 것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이는 국제사회의 권력 정치적 생리와 현실에 어둡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은 서독의 동독 흡수통일을 염두에 두는 것 같은데 지금 만약 북한이 내부적 요인에 의해 붕괴되더라도 절대로 남한에 흡수통일되는 경우는 없다고 저는 봅니다. 당시 동독의 경우 가장 강력한 후원국이 소련인데 소련이 제 코가 석 자다 보니 동독을 도와줄 수 없었습니다. 서독의 흡수통일이 가능했던 배경입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북한이 붕괴돼서 한반도에 남한 위주의 친미적 통일국가가 들어서는 것을 중국이 용인하거나 감내해줄까요? 절대 아닐 겁니다. 북한이 붕괴하면 중국은 북한군부 내 친중 강경세력으로 하여금 허수아비 정권을 수립하거나 자기들이 보호 중인 친중 성향의 김정남을 내세우더라도 친중국 정권을 옹립할 것입니다.”

―중국이 관건이군요. 중국과는 어떻게 지내야 할까요?
“중국과 친하게 지내야 합니다. 그것도 아주 가깝게. 한반도가 남한 위주로 통일되더라도 중국 국익에 마이너스가 되지 않으며, 통일한국이 친미 일변도의 나라가 아니라는 인식을 중국에 심어줘야 합니다. 과거 수천 년간 한반도와 중국이 그래왔듯 인적·경제적·문화적·군사적으로 깊은 연관관계에 있다고 중국이 확신할 때 남한 위주의 통일이 가능합니다.”

―지금 우리 정부의 대(對)중국 외교 노선을 평가한다면?
“너무 미국 일변도의 외교에 치우쳐 있습니다. 뉴스를 보니까 일본자위대와 한국군이 군사협력을 추진한다고 해요. 연대해서 훈련을 한다는 말인데 일본군이 언제 한국전쟁 때 우리를 도와주기라도 했습니까?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견제하는 데 한국을 필요로 합니다. 일본―대만―호주를 마지노선으로 하는 대(對)중국 봉쇄 전략입니다. 연평도 포격 도발 사태가 일어났을 때 미국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호가 며칠간 서해에 머물고, 한·미·일 3국 외교장관 회담을 열고…. 한국 정부가 점점 더 중국과 대립하고 촉각을 세우게 되면 우리의 안보위협은 그만큼 더 커집니다. 우리가 대중국 외교를 너무 잘못하고 있습니다. 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스크 보도에 따르면 우리 정부의 고위 관계자들이 다이빙궈(戴秉國)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등 요인들을 비하하는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잖습니까?”

통일을 원하면 중국과의 관계 개선이 우선
―이런 한국 정부의 태도에 중국이 언짢을 수도 있겠군요?
“지난해 천안함 침몰 사건 얼마 뒤인 4월 말 이 대통령이 중국 상하이 엑스포 개막식 참석차 중국을 방문해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했지요. 그리고 며칠 뒤 후 주석이 북한 김정일 위원장과 회담을 했습니다. 그때 우리 정부는 어떻게 대응했나요? 주한 중국대사를 각각 외교부 청사와 통일부 청사로 초치(招致)해 유감을 전달했고 중국이 이에 발끈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중국 입장에서는 자기네 우방국과 계획된 정상회담을 한국에서 왜 가타부타 참견하느냐고 반발했던 것이죠. 중국과 북한의 특수관계에 비춰볼 때 설령 한중 정상회담과 북중 정상회담이 같은 날 열린다 해도 문제가 될게 있나요? 우리가 이의를 제기하는 게 우스꽝스러울 뿐이에요. 우리가 중국더러 북한과 잘 지내라, 우리도 북한과 잘해보마, 북한이 핵을 가지거나 도발을 못 하도록 너희가 북한에 식량과 비료를 줘라, 그러면 중국의 아시아 패자 역할을 인정하겠다고 다독거려도 시원찮은 판국입니다. 연평도 포격 도발 이후 다이빙궈 국무위원이 방한했을 때 우리가 어떻게 했나요? 환대하기는커녕 콧방귀만 뀌었습니다. 미국에 가서 한·미·일 3국 외무장관을 여는 등 철저하게 북한과 중국을 고립하고 봉쇄·견제하는 미국의 정책에 부응하는 노선을 우리 정부는 밟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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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역삼동 변호사 사무실 앞에 선 박철언 전 장관.

―그래도 전통적인 한미 동맹노선이 우선 아닐까요?
“우리는 100년 전 나라를 잃었던 통한의 기억을 되살려야 합니다. 100년 전 세계의 중심은 중국이 아니라 산업화에 성공한 미국·영국·유럽의 나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은 이들이 세계의 패권을 가졌다는 것을 모른 채 여전히 세계의 중심이 중국인 줄로만 착각하고 중국에만 친청파니 뭐니 하고 매달렸습니다. 또 세상 돌아가는 것과 무관하게 개국이냐 쇄국이냐를 둘러싸고 명성황후와 대원군이 다퉜지요. 일본은 세계의 패권이 영국·미국에 가 있다는 점을 재빨리 깨닫고 명치유신을 통해 세계 6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합니다. 1895년 중일전쟁,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이기고 나서는 미국·영국 등과 막후 흥정을 벌여 한반도는 일본, 필리핀은 미국, 홍콩은 영국이 흡수하는 쪽으로 외교를 펼쳤습니다.

이게 100년 전 국제정치의 모습입니다. 지금은 1990년 소련 붕괴 이래 20년간 계속돼온 미국의 일국 패권주의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로 막을 내리고 중국이 G2 체제의 새 강자로 등장했습니다. 중국은 미국의 제1 채권국이자 외환보유고가 가장 많은 나라입니다. 아시아에서 파워를 가지고 있고 지정학적으로 우리와 붙어 있는데 어찌해서 우리가 아직도 미국 일변도의 외교·안보·통일정책에 빠져 있는 것입니까? 이제는 중국에 대해 더 유연한 접근을 꾀할 때입니다.”

―북한과의 관계는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한마디로 국가안보는 완벽하게 해야 합니다. 그에 더해 대북정책은 탄력 있게 구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 정부는 반대로 하고 있어요. 연평도 포격 도발에서 나타나듯이 국가안보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데 북한에 자꾸 감정적인 싸움을 겁니다. 너희가 사과하고 관계자를 처벌하지 않으면 6자 회담도 대화도 안 하겠다, 대북심리전은 어떻게 하겠다는 등등.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김정일·김정은과 감정적으로 대결할 필요는 없습니다.”

―북한이 대화에 성의를 보이지 않고 강경한 도발을 일삼는 가운데 정부로서도 뾰족한 카드가 없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한·미·일 협력도 자발적이라기보다는 ‘강요된 선택’에 가깝다고 여겨집니다만.
“꼭 그렇다고만 보기도 어려운 게 지난해 4월 김일성 주석 생일에 북한이 60억원을 들여 불꽃놀이를 했을 때 이대통령은 ‘백성들은 어려운데 그 돈으로 옥수수를 사면 얼마나 (많이) 살 수 있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이런 말들은 우익단체에서는 그보다 더 심하게 해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할 말은 아니지요. 또 언론에 보도된 올해 통일부 업무계획에 따르면 비핵화와 대외개방, 민생우선을 통한 북한의 근본적 변화 견인을 중점 추진과제로 내세웠습니다. 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남북통일을 준비하는 쪽으로 대북정책을 전면 수정하겠다고 했지요. 말하자면 북한 내부를 무너뜨리겠다는 것입니다. 개혁과 개방, 근본적인 변화 이런 것은 김정일이 가장 싫어하는 것 아닌가요? 통일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바탕을 둔다는 얘기를 미리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런 말은 북한뿐 아니라 중국도 싫어합니다. 중국이 시장경제는 채택했지만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도입한 나라는 아니잖아요. 중국도, 북한도 반발할 얘기를 통일부 장관이 할 이유가 없다고 저는 봅니다.”

―우리나라를 공격한 적에게 대화의 손을 내밀자는 말씀인가요?
“다시 말하지만 안보는 확고히 해서 공격해오면 응징해야 합니다. 하지만 대화는 끊어져서는 안 됩니다. 전쟁 중에도 대화는 하지 않습니까? 전두환 대통령 때도 그랬습니다. 1983년 10월 9일 버마 아웅산 폭탄 테러로 많은 정부 요인이 희생되고, 남북은 전쟁 일보직전의 긴장 상태로 갔습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84년 9월 북한이 우리에게 수해구호물자 지원 제의를 해왔고, 우리가 이를 수락함으로써 남북간 물꼬가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전두환 대통령의 의중에 따라 1985년 7월 ‘평화통일을 위한 정상회담 준비를 위한 차관급 실무회담’이 열리게 됐습니다.”

북한과 맞서자면 핵·미사일 개발해야
―정부는 6자 회담에 여전히 회의적인 것 같습니다.
“6자 회담을 안 하면 누가 덕을 보고 누가 손해일 것 같습니까? 북한은 지금도 핵개발을 합니다. 시간은 북한편입니다. 장차 미국이 북의 비핵화를 끝까지 지켜주리라 보십니까? 북한은 2번의 핵실험을 했고 이미 6~10개의 핵무기를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가 하면, 지금은 우라늄 농축 핵시설 건설에 박차를 가합니다. 확언컨대 절대 핵보유를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 역시 알카에다
와 같은 테러조직 등으로의 반출을 막는 선에서 만족할 가능성이 굉장히 큽니다. 우리의 대북·외교정책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제가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북한이 핵을 가진 마당에 우리는 어떤 대응 조치를 해야 하나요?
“북한이 핵을 가졌다면 누가 누구를 포용한다는 말인가요? 북한이 핵을 가진 이상 과거의 재래식 무기 우위는 의미가 없습니다. 미국·일본과 며칠간 군사훈련을 한다고 국민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나요? 안 됩니다. 우리도 미국과 담판을 해야 합니다. 우리도 자체적으로 핵을 개발하거나 미국의 전술핵을 남한에 재배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민족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에요. 한미원자력협정에 묶여 핵폐기물 재처리도 못 하고, 한미 미사일 지침에 따라 탄도미사일 사거리도 300km를 넘지 못합니다. 북한은 이미 사거리가 3200km나 되는 미사일을 개발했는데 말이죠. 이에 맞서 한국도 사거리를 3000km까지 늘리도록 미국과 담판해야 합니다. 중국과도 북핵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지 않으면 이렇게 할 것이라는 담판이 필요합니다.”

―미국이 응할까요?
“역사가 말해줍니다. 역대 한국 대통령들은 국가의 위기에서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정전 협정을 미국이 일방적으로 체결하려 들자 이 상태로는 정전협정을 못 한다며 반공포로 2만7000명을 풀어줘버렸습니다. 최후의 일각까지 북진통일하겠다고 버티니까 미국이 준 게 한미상호방위조약입니다. 박정희 대통령도 핵개발 카드를 내밀어 1978년 한미연합사 창설이라는 성과를 거뒀죠. 미국과 담판한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의 국가 위기관리의 슬기를 이 대통령도 배워야 합니다.”

―과거 북한을 20여 차례 방문한 남북협상 담당자로서 지금 북한 후계구도의 미래를 어떻게 예상하시는지요?
“북한정권의 속성상 김정일―김정은 체제가 서서히 자리 잡아가는 정착화 과정이 큰 무리 없이 진행된다고 보입니다. 하지만 체제의 성공 여부는 경제회생에 달려 있습니다. 김일성 주석 사후 여러 자연재해와 식량난 때문에 북한 경제가 굉장한 곤경에 처해 있지요. 식량난·유류난·생필품난 등의 문제를 김정은이라는 젊은 체제가 어느 정도 신속하게 해소하고 경제를 회생시켜야 북한 주민들에게서 안정적인 승복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 문제를 풀지 못하면 대단한 불안정 요인을 품게 되는 것이고 또 다른 가능성도 존재한다고 봅니다. 어쨌든현재 승계작업 자체는 진행이 잘되고 있다고 보입니다.”

박 전 장관은 6공화국에서 LP로 불렸다. 리틀 프레지던트(Little President), 리틀 프린스(Little Prince)라는 뜻에서다. 경북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엘리트 TK 출신으로 전두환 대통령의 5공에서 청와대 비서관과 안기부장 특보를 지내며 남북 협상의 막후 채널로 활동했으며, 1987년 대선에서는 노태우 전 대통령 선거운동 조직이라 할 ‘월계수회’를 조직, 6공화국 탄생에 주역으로 등장했다. 노태우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 아래 정치 현안은 물론이고 북방정책 등 대외정책의 얼개를 짜는 등 6공 최대 실세이자 대통령의 브레인으로 활약했다. 1990년 민정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3당 합당 당시 김영삼(YS)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 진영을 오가며 설득작업을 전개, 거대 여당인 민자당의 산파역도 했다. 3당 합당 후 민자당에서는 YS의 정적으로서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이면서 각을 세웠고, YS집권 후에는 슬롯머신 사건으로 구속돼 1년 4개월간 수감생활도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질긴 악연
―노 전 대통령 회고록이 완성됐다면서요?

“노 전 대통령의 회고록 준비는 몇 년 전에 끝났습니다. 그걸 언제 발간할지, 또 어떤 내용을 포함할 것이지 아직 논의 중입니다.”

―그 회고록에 비사가 더러 있다지요?
“회고록 내용 중에서 가장 민감한 대목이 김영삼 전 대통령 부분입니다. 6공 당시 노 대통령이 김영삼 총재에게 현재 밝혀진 것 외에도 엄청난 지원을 했을 것 아닙니까? 그 부분을 진실 그대로 밝히느냐, 마느냐의 문제에서 참모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립니다. 저는 진실을 그대로 밝혀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참모들은 새삼스레 평지풍파를 일으킬 필요가 없다며 김영삼총재에 대한 지원 부분은 회고록에서 떼내자고 합니다. 이 참모들은 YS 정권에서도 일한 분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다수의 의견에 따라 돈 문제는 빠질 가능성이 있겠군요?
“저는 그럴 바에야 회고록을 왜 내느냐고 따졌습니다. 노전 대통령의 치적은 진작에 공보처가 펴낸 제6공화국 실록 6권에 방대한 분량으로 나와 있습니다. 적어도 시대의 중요한 역할을 한 대통령이 회고록을 낼 때는 기록되지 않은 진실된 증언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증언록과 자서전은 모름지기 나라와 국민을 위해 바른 기록을 남김으로써 지금의 지도층에게 깨끗하지 못한, 투명하지 못한 행위와 정책결정을 하면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는다는 교훈을 줘야 합니다. 대필작가가 쓰는 무용담·자기미화·자기변명 이런 것들만 늘어놓는 회고록과 자서전은 필요가 없지요.”

―말이 나온 김에 요즘 노 전 대통령의 용태는 어떠한지요? 건강이 많이 안 좋다고는 알고 있습니다.
“5년 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습니다. 식사를 하시거나 의식적인 측면에서는 괜찮은데 언어장애가 있어 말을 정상적으로 하실 수 없습니다. 또 활동장애로 인해 걷거나 일어서거나 사람들과 악수한다거나 제스처를 취하는 게 어렵습니다. 간호하는 김옥숙 여사나 비서진이 고생이죠. 하지만 강한 투병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요즘 활발하게 진행되는 줄기세포 관련 연구에 진전이 있다면 장애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기대 속에서 투병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주로 서울 연희동 자택이나 강원도 용평 숙소에서 요양 중입니다.”

―언젠가 투병 중인 노 전 대통령에게 김영삼 전 대통령이 병문안이라도 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 후로 어떤 연락이 왔나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그야말로 노 전 대통령의 물심양면 절대적인 지원이 주효했습니다. 6공 시절 노 대통령은 제게 자신의 후임으로 YS를 정했으므로 민정계 후보 단일화와 같은 반(反)YS활동을 중단하지 않으면 구속시키겠다고까지 말씀할 정도로 김 전 대통령을 밀어줬습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김영삼 대통령 취임 후 구속됐고,육군대장으로 전역한 분이 이등병으로 강등됐습니다. 그런 불명예와 정신적 스트레스가 오늘날 노 전 대통령에게 큰 병을 불러왔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이나 노 전 대통령이나 다 퇴임하셨고, 두 분 다 더 장수하셔야겠지만 언젠가는 죽음의 문을 앞에 두게 됩니다.

김 전 대통령이 장기투병 중인 노 전 대통령을 찾아가 과거지사에 대해 그 나름대로 원칙에 따른 것이지만 유감이라는 뜻을 표명하고, 위로와 함께 쾌유를 바라는 게 인간적인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현재까지 김 전 대통령 측에서 아무런 연락도 없습니다.”
박 전 장관이 2008년 자신이 맡긴 돈 178억원을 빼돌린 전 대학교수 강 모씨를 상대로 제기한 횡령 관련 손해배상 청구소송은 지난해 11월 법원의 강제조정으로 일단락됐다. 법원은 강씨와 통장 위조를 도운 모 은행 직원과 해당 은행이 연대해서 64억원을 지급하라는 조정안을 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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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김당한 씨와 박철언 전 장관.

―횡령당한 돈의 출처에 쏠리는 세상의 눈길이 부담스럽지않았는지요?
“횡령당한 돈의 통장은 모두 제가 24년 전에 설립한 ‘한국복지통일연구소’ 소유입니다. 복지사업을 하기 위해 연구소에 넣어뒀던 돈을 관리하던 여교수가 횡령한 사건이죠. 당연히 소송을 통해 되찾아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횡령당한 돈은 복지통일재단을 만들고자 선친의 유산과 친인척의 자금을 모은 돈입니다. 되찾는 돈은 복지사업에 다시 활용할 계획입니다.”

―선친께서는 복지와 관련한 유지를 남기셨나요?
“제가 10살 무렵인 1952년 즈음 저희 집은 대구시 대봉동에 있었습니다. 경북중고등학교 바로 앞이었습니다. 자수성가형이자 근검절약을 실천하셨던 아버님은 한겨울 칼바람 부는 아침에 산보 가자며 자식들을 깨워서는 방천(지금의 대구 신천)이라는 하천 주변 피난민촌에 데리고 가시곤 했습니다. 전쟁 피란민들이 움막을 짓고 비참한 생활을 하는 곳이죠. 당시 아버님은 ‘이들도 다 같은 민족이다. 장차 이런 사람들이 함께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친께서 남긴 유지에 따라 대구와 서울에 봉사하는 연구소(한국복지통일연구소)와 포럼(대구경북발전포럼)을 만들었습니다.”

시인이자 교수의 길을 걷는 박철언
올해 69세인 그는 자신의 나이를 계절로 따지면 겨울이라고 했다. 겨울의 입구에 서서 길고 지루한 여생을 어떻게 마무리하느냐가 자신의 숙제라고도 말했다. 그는 2000년 서울 역삼동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지만 유료 변론은 하지 않았다. 필요한 이들에게 개인적인 법률자문을 해주는 정도다. 그의 본업은 변호사라기보다는 교수나 시인에 가깝다. 건국대 석좌교수인 그는 이 학교 언론홍보대학원에서 석사과정 수강생들에게 언론과 민족, 언론과 법을 주제로 1주일에 90분씩 강의를 한다. 그는 또 시인이기도 하다. 그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자신을 시인의 길로 이끌었다고 주장했다.

―1995년 순수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하셨네요?
“YS 정부 출범 직후인 1993년 5월 정치보복을 당해 구속 돼 1년 4개월을 감옥에 갇혔습니다. 수감생활 중의 통한과 분노를 승화하면서 그리움과 안타까움에 옥중시를 썼지요. 작고한 조병화 시인 등의 추천으로 1995년 등단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제가 시인이 된 것도 김영삼 전 대통령 때문이지요. 1995년에는 <4077 면회 왔습니다>, 2004년에는 <작은 등불 하나>라는 시집을 각각 펴냈습니다.2006년에는 제10회 서포문학상 대상을 받았고, 2008년에는 월간 순수문학사 주최 제1회 월간 순수문학작가상을 받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하버드(하는 일 없이 바쁘게 드나드는) 생활을 했습니다.”

―어릴 적 시작(詩作)이나 문학에 관심을 보였나요?
“경북고 재학 당시 ‘청맥’이라는 문학동아리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시인 혹은 젊은이들과 대화하는 교수가 되고 싶었는데 부모의 권유와 강권으로 법대를 가게 됐습니다. 나이 들어 본연의 감성에 충실한 일에 복귀했다고 하겠습니다.”

96세 늙으신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상
박 전 장관의 모친은 96세의 고령에도 정정한 편이라고 한다. 3년 전인 93세까지 대한적십자사 대구지사 할머니 봉사단장을 지냈다. 건강을 생각해 자식들이 억지로 만류했다. 그 후로 넘어져 팔이 골절되기도 하고 최근 3년간 건강이 많이 나빠졌다고는 하지만 기억력이나 판단력은 아주 정확하단다. 걸음이 부자유스러워 지팡이를 쓰는 데서 세월의 흔적을 느낀다. 박 전 장관은 매주 주말이면 어김없이 대구의 노모를 찾는다. 박 전 장관은 “요즘도 내가 가는 날에는 몸단장도 하고, 엷은 화장도 한다”고 전했다. “어머니는 자상하고 섬세한 사랑으로 우리를 쭉 품고 오신다.”

―그 연세에 믿기지 않는 건강을 유지하십니다.
“어머님은 근 30년간 대구할머니회 회장을 지낼 정도로 건강하십니다. 안동김씨 부잣집 딸로 지극히 감성적이었죠. 검소했던 아버님과 달리 잘 먹고 잘 입자는 생활수칙을 가진 분입니다. 지금도 대구에 가면 제가 좋아하는 김치와 잔갈치를 구워 밥상에 올리십니다. 저는 특히 군고구마를 즐기는데 고구마 굽는 일도 빠뜨리는 법이 없습니다. 몸이 좀 안 좋아지신 3년 전부터는 두고 있는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밥상은 꼭 직접 차려주십니다. 제가 상경하면 역까지 나와서 전송하십니다.”

박 전 장관은 자신의 5공화국에서 DJ 정부에 이르기까지 20여 년에 걸쳐 대통령 정무·법률비서관, 국가안전기획부장 특별보좌관, 대통령 정책보좌관, 정무장관, 체육청소년부 장관, 3선 국회의원으로서 현대사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자신의 말대로 남북비밀회담 수석대표로 북측과 민족 문제를 논의했으며, 6·29 민주화 선언을 기초하고 3당 통합을 실현시켰다. 또 DJP연합과 정권 교체에도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때문에 2000년 총선에서는 지역구인 대구 수성갑에서 지역민들로부터 버림을 받아 정계에서 은퇴했다. 온갖 권력과 영화를 누리다가 투옥되고 낙선의 쓰라림도 맛봤기에 그를 ‘비운의 황태자’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정치의 쓴맛·단맛을 다 맛본 그에게 다음 정권의 주인이 누가 될 것인지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는 “여당에서는 박근혜 전 대표가 선두주자로 독주하고 있고, 야당에서는 도토리 키재기지만 국민참여당 유시민 참여정책연구원장이 제일 앞서고 있다”고 운을 뗐다. 그는 유시민원장이 민주당 후보가 될 가능성이 높은 손학규 민주당 대표에게 후보 단일화를 제의할 것이고 둘 중에서 야권의 단일 후보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본선은 30~40%에 이르는 중도성향의 유권자를 누가 끌어안느냐가 관건입니다. 천안함·연평도 사건 등으로 보수 쪽이 유리한 분위기를 타고 있지요. 전체적으로박 전 대표 쪽이 유리한 입장에 있는데 앞으로 지켜봅시다.”

박성현 기자 psh@joongang.co.kr 사진 박상문 월간중앙 사진팀장 [moon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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