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1㎜ 움직여 실격, 룰 개정 여론 일자 “원칙은 원칙”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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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호 14면

아부다비 HSBC 1라운드에서 스코어카드 오기로 실격 판정을 받은 파드리그 해링턴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아부다비(UAE) AP=연합뉴스]

2000년 영국 벨프리에서 열린 유러피언 투어 벤슨&헤지 인터내셔널 오픈. 파드리그 해링턴(40·아일랜드)이 5타 차 선두로 마지막 라운드를 준비하고 있었다. 벨프리 클럽의 한 회원은 우승이 유력한 해링턴의 스코어카드들을 기념으로 챙겨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없었다. 1라운드 스코어카드에 해링턴의 사인이 없었다. 해링턴의 스코어카드에 사인을 하도록 돼 있는 제이미 스펜서는 제대로 사인을 했다. 하지만 해링턴이 사인을 해야 할 곳엔 또 다른 동반자인 마이클 캠벨의 사인이 있었다. 해링턴과 캠벨이 상대의 스코어카드에 사인을 한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실격자, 파드리그 해링턴

회원은 고민 끝에 이 사실을 경기위원회에 보고했다. 경기를 준비 중이던 해링턴은 소환돼 잘못된 카드를 확인한 후 실격됐다. 의도하지 않은 실수였지만 용서받지 못했다. 골프는 감시하는 심판 없이 플레이어의 양심을 믿는 스포츠이기 때문에 본인이 사인한 스코어카드 오기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하다.해링턴은 오뚝이다. 2007년 디 오픈 챔피언십 1타 차 선두를 달리다 마지막 홀에서 두 번이나 물에 공을 빠뜨리고도 더블 보기로 틀어막아 연장 끝에 우승했다. 2008년 PGA 챔피언십에서 우승할 때는 5오버파로 간신히 컷을 통과한 후 3, 4라운드 연속 66타를 쳐 우승했다.
 
TV 보던 골프팬 “1㎜ 움직였다” 신고
올해는 그에게 매우 중요한 해다. 메이저 3승을 거둔 이후 스윙 교정을 시도하다 2년여 슬럼프를 겪었기 때문이다. 지난겨울 아일랜드의 강한 바람 속에서 훈련하면서 시즌 개막을 기다려왔다고 한다. 지난 20일 해링턴은 자신의 시즌 첫 경기인 아부다비 HSBC 1라운드에서 7언더파 65타를 치며 1타 차 2위에 올라섰다. 들뜬 마음으로 2라운드 경기를 준비하던 그에게 또다시 경기위원회로 나오라는 통보가 왔다. 전날 TV로 경기를 본 시청자가 해링턴의 공이 움직였다고 경기위원회에 e-메일로 신고했다는 것이다. 7번 홀에서 볼마커를 빼는 과정에서 해링턴은 실수로 볼을 살짝 건드렸다. 해링턴은 “맞다. 그러나 볼이 움직였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주장했다.

그린에서 마크하는 과정에서 공이 움직였더라도 제자리로 돌아온다면 그냥 치면 된다. 벌타는 없다. 그러나 상황이 약간 달랐다. 비디오 판독 결과 볼은 원래 있던 자리에서 1㎜쯤 앞에 멈췄다. 해링턴이 이를 알고도 무시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미심쩍었다면 그는 경기위원을 불러서 유권해석을 들었을 것이다. 움직였다 하더라도 원래 자리에 벌타 없이 공을 놓고 치면 된다. 게다가 그가 얻는 이득이라야 1㎜도 안 됐다. 그러나 해링턴은 1㎜ 때문에 2벌타를 부과하지 않은 스코어카드에 사인함으로써 스코어카드 오기로 실격됐다. 그것도 거실 쇼파에 누워 감자칩을 먹으면서 중계를 보던 누군가의 e-메일에 당한 것이다.

스포츠 스타들이 이런 일을 당할 때 대개 반응은 이렇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 술을 진탕 마시고 화장실 거울을 샌드백 삼아 맨주먹을 날리는 것이다. 그러나 해링턴은 경기장에 남아 인터뷰를 했다. “실망스럽긴 하지만, 나쁜 일은 흔히 생기기 마련”이라고 했다. 그는 5타 차 선두를 달리다 실격당한 2000년의 일을 얘기하면서 “이보다 훨씬 나쁜 일도 생길 수 있다. 그런 일들 속에서 뭔가를 배울 수 있으면 된다. 나는 마음이 편하다”고 말했다.

그의 아버지는 법질서를 수호하는 더블린의 하급 경찰이었다. 해링턴은 골프 실력이 매우 뛰어났는데 다른 선수들과 달리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20대 중반에 프로로 전향했다. “배움은 매우 중요하다. 삶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아버지의 조언 때문이었다. 해링턴은 왜 규칙이 중요한지 얘기했다. “규칙은 우리의 게임을 공평하게 하고 지켜주는 것이다. 특히 골프가 직업인 선수들은 규칙을 잘 지키고 우리 행동기준을 사랑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다른 선수들이 코스에서 공을 치던 3라운드와 4라운드에 해링턴은 자발적으로 갤러리를 모아놓고 강의를 했다. 실격 상황과 골프 규칙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많은 팬이 몰려들었다.

해링턴의 실격 사건을 계기로 룰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골프 룰이 너무 경직돼 있고, TV 시청자의 신고를 받아들이는 것도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해링턴에 앞서 카밀로 비제이가스(컬럼비아)는 공이 움직이는 동안 낙엽을 치워 벌타를 받아야 하는 상황인데 이를 몰랐다. 그는 벌타가 더해지지 않은 스코어카드에 사인을 해 실격됐다. 이 또한 TV 시청자가 신고한 일이었다.

모르고 한 실수를 스코어카드에 기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실격시키는 것이 과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실격이 아니라 그냥 벌타만 부과하자는 것인데 유러피언 투어와 미국 PGA 투어는 제법 강하게 규칙 개정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시청자의 뒤늦은 지적으로 실격되는 선수는 TV에 나오는 스타급이고 그들이 없으면 흥행에 커다란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팀 핀첨 미국 PGA 투어 커미셔너는 “룰을 담당하는 미국골프협회(USGA) 관계자를 만나 선수들이 억울하게 실격되지 않도록 골프규칙 개정을 요구하겠다”고 했다.

“규칙 개정 사인하기 전 깊이 생각을”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규칙 개정에 찬성하는 건 아니다. 타이거 우즈는 “직업으로 골프를 하는 프로골퍼들은 룰을 잘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모르고 한 실수’는 변명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해링턴은 벌타를 받아야 하는지 모르고 스코어카드에 사인을 했다가 뒤늦게 알려져 실격당하는 건 바꿀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머지 룰 개정에는 부정적이다. “규칙 개정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 신중하게 고민해야 한다. 다소 부조리하게 보일는지 모르지만 100년 넘게 골프 룰이 있었던 건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시청자의 경기 개입을 막자는 의견에 대해서도 해링턴은 “많은 사람이 우리를 보고 있는 게 나쁠 건 없다. 골프 코스에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하지 않는다. 더 많은 사람이 유러피언 투어를 보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정리했다. “지금 움직인 것이 1㎜에 불과할지 몰라도 일주일 후면 1인치(2.54㎝)가 되고 더 지나면 5인치가 될 수도 있다. 스코어카드에 사인하기 전처럼, 규칙 개정에 사인하기 전에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자신이 실격당한 이유인 1㎜와 스코어카드 사인을 들어 설명한 의견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해링턴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실격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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