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우 기자의 까칠한 무대] 박칼린은 어디 있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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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이번 주 공연계는 배우 옥주현으로 시끌시끌했다. 그가 출연 중인 뮤지컬 ‘아이다’가 무대에 올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말은 이렇다.

 일요일인 지난 23일 경기도 성남아트센터에서 오후 2시와 6시30분, 두 차례 ‘아이다’ 공연이 예정돼 있었다. 두 번 다 옥주현이 서야 했다. 낮 공연 초반엔 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후반부로 가면서 목에 이상이 왔다. 쇳소리가 나고, 고음 처리가 안 됐다. 낮 공연을 마친 시각은 4시40분, 다음 공연까지 채 2시간이 남지 않았다. 허겁지겁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병원에선 “성대엔 별 문제가 없다”란 진단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소리는 갈라졌고, 목은 아팠다. 무대에 서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시간은 촉박했지만 뾰족한 대안은 없었다. 상당수 관객은 눈길을 뚫고 이미 극장에 와 있었다. 저녁 공연 시작 20분전, 내부적으로 공연 취소를 결정했다. 그리고 막이 오르자 옥주현은 직접 무대에 올라 1200여 관객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환불 조치도 취해졌다.

 지난해 12월 오픈한 뮤지컬 ‘아이다’는 3월말까지 120여 회 공연이 예정돼 있다. 더블·트리플 캐스팅 등 주인공을 두세 명 배우가 번갈아 가는 게 아닌, 혼자서 책임져야 하는 ‘원 캐스팅(one casting)’이었다. 옥주현 역시 혼자 여주인공을 소화해야 했다. 공연이 취소되자 “옥주현의 욕심 탓”이란 비판이 비등했다.

 하지만 옥주현은 기계가 아니다. 3개월이 넘는 공연에서 어떻게 늘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컨디션 난조, 갑작스런 사고 등을 대비하는 게 ‘언더스터디(understudy)’라 불리는 대역 배우다. 해외에선 대역이 무대 서는 일이 흔하다. ‘아이다’ 공연 취소의 핵심은 “옥주현이 왜 무대에 서지 못했나”가 아니라 “왜 대역을 세우지 못했나”다.

 옥주현 출연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서자, 제작진은 대역에게 즉각 연락했다. 하지만 대역 배우는 “자신 없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주역이 무대 설 수 없기를 내심 바라는 게 대역이다. 자신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다.

제작사는 “대역의 런스루(run-through·실제 공연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중단 없이 연습하는 것)가 사실 한번도 없었다”라고 인정했다. 결국 ‘아이다’ 공연이 취소된 건 준비 안 된 대역 때문이었다. 대역을 관리하고 연습시키는 건 철저히 연출부의 책임이다. ‘아이다’의 국내 연출가는, 바로 박칼린이다.

 책임 추궁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게, 박칼린으로선 억울할지 모른다. 대역 연습은 거저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다른 배우도 필요하고, 연습실과 간단한 세트도 있어야 한다. 그게 다 돈이요, 시간이다. 제작사가 대역 연습에 적극적이지 않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박칼린이 누군가. 현재 국내 뮤지컬계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다. 그가 방송에서 “플랫!”이라며 엄격함을 요구했던 것처럼, “대역 연습 해야 돼!”라고 했다면 감히 누가 거역했을까.

 평범한 이들을 향한, ‘칼린 샘’의 절절한 눈빛에 대중은 열광했다. ‘남자의 자격’ 오합지졸 합창단은 어쩌면 스테이지 뒤에서 묵묵히 연마하고 있는 대역 배우와 닮은 꼴이다. 박칼린은 에세이집 『그냥』에서 “공연엔 용서가 없다”고 일갈했다. 그는 지금 자신에게 너무 관대한 게 아닐까. 공연이 취소되자 옥주현은 무대에서 눈물을 보이며 사과했다. 정작 고개를 숙여야 했던 건 박칼린이었다.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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