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6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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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가족회의, 본능적으로 9

식사는 조용하면서고 따뜻하게 진행됐다.
어쩌다가 화제가 노과장에게 이르렀지만 깊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사고를 만나거나 할 사람이 아닙니다. 사막 한가운데 있어도 살아 돌아올 사람이니 곧 나타날 겁니다.”라고 백주사가 말했고, “그러믄요.”라고 M자형 머리가 거들었다. 이사장은 반응을 하지 않았다. M자형 대머리와 꽁지머리 남자는 강원도 어디에서 온 것 같았다.

명안진사에서 부설한 노인복지시설이 따로 더 있는 모양이었다. 백주사는 그곳을 ‘제석궁’이라 불렀다. 부처의 수호천사에 해당하는 최고의 신 샤크라가 거주하는 궁전을 제석궁(帝釋宮)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나중에 안 일이었다. 착한 마음이 근본인 선견성(善見城) 안에 자리 잡은 제석궁은 수많은 구슬로 둘러싸여 있으며 최고의 신이 지키는지라, 모든 번뇌가 사라져 없는 일종의 피안이라고 했다. 더 이상 늙음도 죽음도 없는 곳이었다.

여린은 내내 말이 없었다.
그러나 표정은 부드럽고 자애로웠다. 그녀가 원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세지라는 법명을 받고 나서 더 표정이 깊어진 느낌이었다. 미소보살이 어머니처럼 그녀에게 음식을 일일이 챙겨 먹이는 것을 나는 힐끗 보았다. 나와 대각선으로 앉아 있었다. 콧날이 오똑하고 쪽진 머리 아래의 이마는 옥양목처럼 하얬다. 파르스름한 핏줄이 이마 한가운데를 고요히 가로지르며 흘렀다. 언제인가, 내 입술이 꼭 한 번 닿았던 적이 있는 이마였고 핏줄이었다.
관음봉에 나란히 앉아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눈먼 아버지가 동사무소에 찾아가 ‘개백정 무허가 집을 철거시키라’면서 소란을 피우던 날이었다. 소란은 그 무렵 매일매일 계속됐다. 혼자 관음봉 정수리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는데 그녀가 책가방을 든 채 다가와 옆에 앉았다. 하교하면서 아버지가 소란을 피우는 걸 보고 오는 중이라고 했다. “오빠네는 왜 우리 아빠한테 암말도 안해? 화 안 나?”라고 그녀는 다부진 어조로 물었다. “너의 아빠니까.” 라는 대답이 떠올랐으나 차마 말은 나오지 않았다. “속으로는 날 미워하지? 그렇지?” 그녀가 다시 물었고, 나는 머리만 저었다. “거짓말! 미워하면서?” 그녀는 집요하게 묻고 또 물었다.

아무리 고개를 저어도 다잡아 묻는 동어반복은 계속됐다. “정말 안 미워한다면…… 내 볼에…… 뽀뽀해봐!” 그렇게 된 것이었다. 황혼이었고 놀은 타는 듯이 붉었다. 열네 살 그녀의 새하얀 이마엔 지금처럼 핏줄이 파르스름하게 불거져 나와 있었다. 피돌기가 두근거리며 뛰고 있었다. 나는 땀에 젖은 그 핏줄에게, 피돌기에게 가만히 뽀뽀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으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고 만 기억이었다. 나는 그녀의 이마를 가르고 내리닫이로 흐르는 그 핏줄을 보았다. 오래전 메마른 내 입술이 내려앉았던 바로 그 이마, 그 핏줄이었다. 파르스름한 그곳에 귀를 갖다 대면 멀고 깊은 강물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올 것 같았다.

이사장은 프로그래머와 컴퓨터 관련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프로그래머에게 대외홍보 관련 일을 일체 맡기겠다고 했다. 관청이나 건설회사를 상대하는 데는 세련되고 상냥한 성격인 프로그래머가 적임임에 틀림없었다. 여고생의 억울한 투신에는 눈 감는 대신 힘을 다해 프로그래머를 방면하도록 도운 뜻을 알 만했다. 봄에는 문화궁을 반드시 완성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한참이나 오고갔다. 관건은 문제가 되어 보류한 건축허가를 원만히 얻어내는 일이었다. 이사장은 문화궁의 완성을 ‘꿈’이라고 말하면서, 낙관적인 표정을 했다. 지난 번 시장과 국회의원이 명안진사에 들렀을 때 건설회사 오너를 동반한 걸로 보아 뭔가, 언질을 받아놓은 눈치였다. 이사장은 그 일도 프로그래머에게 맡겼다. 그리고 곧 화제가 내게 닿았다.

“자네를 오늘 이후로 과장이라 부르겠네.”
나는 영문을 몰라 말없이 이사장을 보았다.
“유과장이 좋겠어. 필요하면 주민등록을 새로 만들어. 그건 백주사가 알아서 할게고. 앞으로는 김실장이나 백주사의 말에 따라 안팎의 일을 두루 돕도록 하게나. 운전면허도 따고. 경비는 곧 다른 사람이 올 게야. 왜, 싫은가?”
“아, 아닙니다. 싫다니요.”
내가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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