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통령 - 기업총수 간담회] 총수들은 명찰 떼고 대통령은 말 아끼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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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이명박 대통령과 30대 주요 기업 총수들의 만남은 전과 사뭇 달랐다. 사라진 한 가지가 그런 차이를 만들었다. 바로 ‘격식’이었다. 이 대통령이 직접 서울 여의도 KT빌딩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의실을 찾은 것부터 그랬다. 현직 대통령이 직접 전경련을 방문한 것은 처음이다. 대통령 스스로 기업인들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지금까지는 한국무역협회가 주최하는 무역투자진흥회의 등 공식 행사가 아닌 경우는 총수들을 청와대로 부르는 게 상례였다. 전경련의 한 간부는 “재벌 총수들이라도 청와대에서는 위축되게 마련”이라며 “그러나 이번엔 홈그라운드에서 만남이 이뤄져 훨씬 분위기가 부드러웠다”고 말했다. 후보 시절부터 ‘친기업’을 트레이드 마크로 내세웠던 이 대통령은 2007년 12월 28일에도 전경련을 찾은 바 있으나 당시는 당선인 신분이었다.

 명찰도 사라졌다. “잘 아는 분들 만나는데 굳이 명찰이 필요하겠느냐”는 이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홍상표 청와대 홍보수석은 “권위적으로 비쳤던 의전 관행을 고쳐 편안하고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소통을 하겠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장소·명찰 같은 형식뿐 아니라 내용도 바뀌었다. 지난해 9월 청와대에서 대기업 회장 12명을 만났을 때만 해도 대통령은 ‘듣는 쪽’이 아니라 ‘말하는 쪽’이었다. 당시 이 대통령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반성장·상생협력이 중요하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총수들도 나름의 동반성장 계획을 보고하기는 했지만, 만났던 시간 대부분은 청중으로서의 자세를 유지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대통령이 청중이 됐다. 이 대통령은 처음 3분 정도의 인사말을 한 뒤 발언권을 재계로 넘겼다. “자유롭게 말할 수 있도록 발언자를 지정하지 말아 달라”는 주문까지 했다. 총수들은 이날 모임의 주제인 투자·고용·동반성장에 대한 보고뿐만 아니라 각종 요구도 했다. 자유무역협정(FTA)을 적극 추진해 달라는 것도 있었고, “정부가 나서서 서울이나 인근에 초일류 연구개발(R&D) 센터를 만들 수 있도록 해달라”는 주문도 나왔다.

 격식이 사라짐으로써 대통령과 재계의 사이는 몇 걸음 가까워졌지만, 전경련은 이날 풀지 못한 과제가 그대로 남아 있음을 보여줬다. 차기 회장 문제다. 간담회장에 들어오는 총수들은 “다음 전경련 회장을 맡겠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하나같이 손사래를 쳤다. 현 조석래 회장은 다음 달 말로 임기가 끝난다. 이에 따라 전경련은 앞으로 한 달 안에 새 회장 후보를 추대해야 하는 상황이다.

권혁주·한은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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