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6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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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가족회의, 본능적으로 5

‘가족회의’가 열린 것은 노과장이 실종되고 열흘쯤 후였다.
사람들은 그 모임을 ‘가족회의’라고 불렀다. “자네가 가족회의에 참석하게 되다니 영광이라고 여기게.” 백주사가 말했다. 백주사와 김실장은 여전히 나에 대해 좋은 느낌을 갖고 있지 않았다. 좋은 느낌은커녕 볼 때마다 무엇인가 미심쩍다는 눈빛이었다. 샹그리라의 팬트하우스라 할 꼭대기층, 이사장의 사적 공간에서 열린 모임이었다. 이사장이 소집하면 모이는 부정기적 모임이라고 했다. 관음과 세지가 계를 받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라고 했으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김실장과 함께 살던 땅딸보 남자가 죽고 노과장까지 실종됐으니, 어쩌면 이사장은 위기감을 느꼈을는지도 몰랐다.

참석자는 이사장을 제외하고 아홉 명이었다.
백주사와 김실장과 미소보살이 핵심이었고, 애기보살과 여린이 합류했으며, 컴퓨터 프로그래머와 내가 신입으로 처음 초대되었다. 나머지 두 사람은 평소의 명안진사에선 볼 수 없었던 낯선 얼굴이었다. 한 명의 남자는 사십대 중반쯤 되는 남자로 머리가 M자 형으로 벗겨졌으며, 다른 한 명은 비교적 젊은 얼굴로 꽁지머리를 하고 있었다. ‘패밀리’들이 다 그렇듯이 두 사람 역시 체격이 자못 단단하고 다부져 보였다. M자 머리 남자는 낯이 익었다. 노과장이 실종되고 나서 명안진사에 한 번 들어온 적이 있었던 남자라는 사실을 기억해낸 건 각자 좌정을 끝낸 후였다.

이사장의 집을 안까지 들어와 본 것은 처음이었다.
상상했던 것과 달리, 이사장이 사는 펜트하우스 거실은 놀라울 정도로 검소하고 담백했다. 인테리어라고 부를 만한 장식이 거의 없어 차라리 황량해 뵐 정도였다. 인상적인 것은 거실만 해도 교실과 견줄 만큼 넓다는 것이었고, 거실 벽에 갖가지 검(劍)이 걸려 있다는 것이었다. 이사장은 무사이면서 동시에 검의 수집가였다. 단검도 있었고 장검도 있었다. 박물관에 보내야 할 법한 낡은 고검(古劍)도 많았지만 지금이라도 쓸 수 있는 진검(眞劍)도 많았다. 어떤 검은 신월(新月)처럼 굽었고 어떤 검은 창만큼 길었으며 어떤 검은 유리같이 투명했다. 이사장은 칼날을 닦고 있었다. 잘 갈린 것이, 진검이었다.

“이번에 좋은 일본도를 하나 구했어.”
이사장은 칼날을 허공으로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건 접철방식으로 제조한 일본도야. 쇠를 달구어서 두들기고 식히고를 반복해 만드는 단조방식과 차원이 다른 칼이지. 여기 물결무늬 좀 봐. 아름답지 않은가. 일부러 새긴 무늬가 아닐세. 쇠를 여러 번 접어 만들기 때문에 절로 생긴 무늬야. 아름다운 것엔 다 살(殺)이 깃들어 있어. 이 칼은 휘어질망정 절대 부러지지 않아. 단칼에 목을 날릴 수 있으이.”

“군도(軍刀)로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백주사가 추임새를 넣었다.
“일본도가 다 군도지. 내가 좋아하는 칼은 끝이 뾰족한 예도(銳刀)야. 저 끝에 걸려 있는 것들을 봐. 깊숙이 꽂아 바람개비처럼 돌리면 심장만을 밖으로 꺼낼 수도 있네. 그리고 참, 이건 칼자루와 칼날이 거의 같은 비수(匕首)인데 최근 선물 받은 걸세. 이걸로 나는 회를 뜨지. 어떤 때는 헛, 손톱을 깎기도 해.”
비수는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그는 비수로 손톱 다듬는 시늉을 하며 웃었다. 그로서는 유머를 날린 모양인데 따라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칼에 대해 설명할 때 이사장의 눈빛엔 광채가 흘렀다. 행복하고 충만한 표정이었다. 귀자도(鬼子刀)라는 말도 나왔고, 월도(月刀), 본국검(本國劍)이라는 말도 나왔다. 뜻은 알 수 없었다. 이순신 장군은 칼날의 길이가 다섯 자(尺)인 쌍수도(雙手刀)를 썼다는 이야기도 뒤따라 나왔다. 내가 알아들은 것은 이사장이 두 번째 유머로 던진 “남자의 참은 칼이고 여자의 참은 바늘”이라는 말이 전부였다. 미소보살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이사장은 그 말을 했다. “안 그런가?” 이사장이 미소보살에게 물었고, 미소보살은 “바늘이 아니라 저도요, 매일 칼을 들어요. 부엌칼요!” 하고 대꾸했다. 백주사가 혼자 헛헛, 과장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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