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도미노’에서 ‘전세난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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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장원기자] “매년 오른 집세도 충당할 수 없는 서민의 비애를 자식들에게는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

요즘 크게 오른 전셋값이 버거운 세입자들이 한번쯤 가질 만한 생각이다.

그런데 이는 지금부터 21년 전인 1990년 4월 어느날 전셋값 급등을 견디지 못한 40대 가장이 부인과 7,8살 자녀 등 일가족 4명이 자살하면서 남긴 글이다.

당시 전셋값 파동은 두달 동안 17명의 세입자들의 ‘자살 도미노’를 낳을 정도로 극심했다. 자살한 이들을 기리는 희생세입자합동추도식이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렸다. 시민단체들의 ‘전월세값 안 올리기 운동’도 등장했다.

국민은행 통계에 따르면 1990년 서울 전셋값은 23.7% 올랐다. 그 전 해에는 29.6% 뛰었다. 1989~1990년 2년 새 60.3%나 치솟은 것이다. 국민은행이 주택시장 통계를 낸 1986년 이후 가장 전세난이 심한 시기였다.

기록으로는 1999년 전셋값이 32.5% 뛰며 가장 높은 상승률을 보였지만 이때는 IMF 외환위기가 터진 1998년 22.4% 급락한 이후 반등분이어서 피부로 느끼기에는 1990년 무렵이 가장 심했던 것 같다.

전세난은 그 이후로도 현재까지 반복되고 있다.

전세난은 통계보다 더 치명적이다. 지난해 서울 아파트 전셋값은 7.4% 올라 1986년 이후 연평균 상승률(8.5%)보다 낮지만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전세 계약기간이 2년이어서 세입자가 피부로 느끼는 전셋값 상승은 2년치에 해당하는 것이다. 2009~2010년 2년간 서울 아파트 전셋값은 16.1%다. 금액으로는 3.3㎡당 95만원 정도다.

2000만원 모았는데 전셋값은 3000만원 뛰어

전용 85㎡ 정도인 112㎡를 기준으로 하면 3000여만원이다.

그런데 2009년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서울지역 가구당 월평균 저축액이 82만원이다. 연간 저축액은 984만원으로 2년간 저축액은 1968만원이 된다.

전셋값이 저축액보다 훨씬 많이 오르니 전세난민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살던 집에 그대로 있으려면 빚을 질 수밖에 없다.

정부는 전세난이 생길 때마다 대책을 내놓았다. 그럼에도 전세난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은 전세난 대책이 과녁에 명중하지 못해서가 아닐까.

1990년 정부의 대표적인 전세 안정 대책이 임대용 다가구주택 건설이었다. 다가구주택 건축규제를 완화해 다가구 주택을 늘려 전세수요를 흡수하려 했던 것이다.

지금도 서울의 단독주택 밀집지역들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3~4층짜리 빨간벽돌 다가구주택은 이렇게 해서 태어났다.

다가구주택은 주택 공급에 초점을 맞춘 첫 대책이기도 하다. 그 이전에는 임대차계약 기간을 2년으로 늘리는 등 주로 세입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대책이 주류였다.

외환위기 이후에는 전셋값도 많이 뛰었지만 월세가 문제가 됐다. 당시 금리가 낮아 전세를 월세로 돌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2001년 한 조사에 따르면 서울 강남 등에서 전세를 월세로 돌린 집이 60% 이상이었다.

분당 서형동 등에선 80~90%에 달했다. 월세 전환이율도 치솟아 15.6~17%였다.

그래서 나온 대책이 2002년 6월 월세 전환이율을 연 14% 이하로 제한하는 것이었다. 월세 전환이율은 그 때 이후 12%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와 함께 추진된 전세 대책이 국민임대주택 100만가구 공급이다. 임대주택을 전체 주택의 10%까지 늘려 임대수요를 흡수하겠다는 것이다.

다가구주택과 국민임대를 거쳐 이번 정부 들어 나온 전세대책용 공급정책은 도시형생활주택이다.

이제까지 정부의 전세대책이 전혀 약발이 없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전세난의 정도는 누그러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 정부의 전세대책도 변죽만 울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도시형생활주택을 늘리겠다고 하지만 1990년대 다가구처럼 확 늘어나기는 힘들다. 땅값이 비싸 사업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부족한 도심 중소형 주택 늘릴 중장기 대책 필요

그나마 원룸형 정도만 늘고 있지만 요즘 전세난은 1~2인 가구가 아니다. 요즘 전세난은 자녀 한둘이 있는 중산층이다.

지역적으로 보더라 2009년 이후 2년새 서울에서 전셋값이 많이 오른 곳은 송파구(29.6%), 강동구(26%), 서초구(24.2%), 강서구(21%),광진구(23%), 강남구(19.6%%) 등 상대적으로 집값이 비싼 지역들이다.

그리고 영등포구(18.2%, 양천구(18.1%), 마포구(16.8%), 성동구(16.3%) 등도 평균(16.1%) 이상 올랐는데 외곽이 아니라 도심권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소•중•대형으로 나눠 주택크기로 보더라도 중형 전셋값 상승률이 14.5%로 소형(14.6%)과 거의 맞먹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지금 부족한 전셋집은 도심 중형인 셈이다. 원룸 위주로 치우친 도시형생활주택으로는 대처하기 힘들다.

무엇보다 중소형 아파트가 필요한 것이다. 2000년대 초중반 중대형집값이 많이 오르면서 중대형을 많이 지은 후유증이기도 하다.

도심 중소형 아파트를 갑자기 늘릴 수는 없다. 전세 대책이라는 게 하루 아침에 뚝딱 집을 지을 수 없기 때문에 한번에 손쉬운 대책을 내놓을 수는 없지만 중장기적으로 보더라도 도심 중소형 주택을 늘리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도심에 중소형 주택 공급을 늘리기가 쉽지 않다는 게 고민이다. 정부나 자치단체 등 공공이 직접 개발하기다 어렵다.

도심 주택공급은 민간에 기댈 수밖에 없는데 도심 재개발•재건축이 순조롭게 이뤄지도록 하는 수밖에는 별다른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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