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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기획] 잠룡들의 배우자, 그들은 누구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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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내년 12월이면 제18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진다. 정초부터 유력 대선 주자들의 발 빠른 행보로 정치권은 술렁인다. 이들 주자 지근거리에 배우자들이 있다. 권력은 정치인과 그 배우자가 공동으로 쟁취한다. 한국의 미래를 책임질 배우자들은 누구며,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배우자의 영향력이 클수록 대선 후보 주변에는 암암리에 파벌이 형성된다.” 대통령선거를 여러 번 치러본 사람들은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심지어 ‘후보파’와 ‘부인파’가 신경전을 펼치는 경우도 있다. 또 그가 대통령이 되면 주변에서는 은연중에 ‘대통령파’와 ‘영부인파’가 갈려 누구의 힘이 센가를 겨뤄보는 일이 우리 정치사에 왕왕 목격되기도 했다.
유력 정치인, 특히 대선 후보의 배우자가 정치에 미치는 영향은 특급 참모의 그것을 능가한다. <한국의 퍼스트레이디>의 저자이자 ‘대통령 배우자 연구소장’을 지낸 조은희 서울시 정무부시장은 “대선 후보에게 배우자가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마지막까지 한 배를 타고, 가장 믿고 의지할 이도 결국에는 배우자”여서 그렇다. “정치인과 배우자는 희로애락을 같이한다.”

대권 內助는 ‘대한민국 情治’龍의 아내가 더 무섭다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 한국에서는 대선 후보 배우자의 존재가 더욱 독특하고 중요하다. 구미 각국의 경우 정치인의 배우자는 공개리에 활동하고 정책 분야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편이다. 그래서 후보와 함께 배우자도 유권자로부터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다.
반면, 한국은 대선 후보 배우자의 활동이 비공식적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소장은 “정책적 영향보다는 심리적 영향을 더 많이 준다”고 지적했다. 후보자가 적극적으로 치고 나가게 하는 긍정의 힘을 발휘할 수도 있고, 반대로 후보를 움츠러들게 해서 중도하차하게 만드는 부정의 힘을 내는 쪽도 배우자다. 결론적으로 영향력은 엄청난데 평가 기회는 드물다.

배우자의 정치 참여는 순기능과 역기능을 동시에 가진다. 배우자는 누구보다 후보자의 장단점을 잘 알기에 실질적인 조언과 충고를 해줄 수 있다. 또 외부에 공개할 수 없는 은밀한 부분도 터놓고 얘기할 상대는 결국 배우자다. 하지만 전문가와 참모들이 오랜 기간 협의한 결정이나 정책이 어떤 때는 배우자의 감이나 순간적인 판단에 따라 뒤집히거나 바뀌는 경우도 배제할 수 없다. 배우자의 조언은 검증되지 않는 속성이 있어 긍정으로 작용할지, 부정으로 귀착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큰 꿈을 꾸는 정치인은 배우자에 대해서도 최대한 냉철한 판단력을 유지해야 한다”고 최진 소장은 말한다.

정치인을 가장 잘 아는 사람도 배우자다. 배우자의 삶과 인생관, 언행을 통해 그 정치인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도 있다. <월간중앙>은 국내 유력 대선 예비 주자 8인 배우자의 면면을 살폈다. 한국이 지난 60년 격동의 시대를 거쳐왔듯이 이들 8인의 배우자도 매우 역동적이고 다양한 길을 걸어왔다. 대선 유력 주자 중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미혼인 관계로,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배우자가 아직 자신의 사적 영역을 보여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밝혀 이번 기획에서 빠지게 됐다.

김영명(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
청탁이 불가능한 해외파
“공직자의 아내로서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는 자세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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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와 김영명 여사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의 부인 김영명 씨는 아버지 김동조 전 외무장관과 어머니 송두만 씨 사이에 2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서울 혜화초등학교에서 3학년까지 다니다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미국·일본 등지에서 살았으며, 초·중·고와 대학까지 모두 해외에서 마쳤다. 고등학교는 미국 워싱턴DC의 ‘국립대성당학교(National Cathedral School)’를, 대학은 웨슬리대(전공 정치학, 부전공 미술)를 나왔다. 그래서 정 전 대표가 “아내는 국내에 중·고교 동창이 없는 만큼 청탁할 사람도 없다”고 말할 정도다. 이른바 ‘해외파’다.

1978년 웨슬리대 3학년 시절 서울의 셋째 언니 소개로 정 전 대표를 만났다. 당시 정 전 대표는 웨슬리대에서 자동차로 약 40분 거리에 있는 매사추세츠공대(MIT) 경영학 석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1년 정도 주로 주말에 만나 사귀다 1979년 결혼했다. 김씨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정 전 대표가 예기치 않은 생일선물을 준다고 해서 거절하기도 하고, 중간에 사랑싸움으로 헤어지기도 했지만 우연한 기회에 다시 만나 결혼에 이르렀다.

김씨는 공직자와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아버지를 통해 공무원 생활의 고달픔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 전 대표도 처음에는 정치한다는 얘기를 하지 않기에 사업만 할 줄 알았다고 김씨는 말했다. “지금은 운명이라 생각하고 공직자의 아내로서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는 자세로 산다.”

김씨가 보는 남편은 “자기 이익보다 나라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아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정신을 가졌다”고 했다. 2002년 월드컵 유치가 그랬고, 2022년 월드컵 도전이 그 예라는 것이다. 그래서 “실패하면 정치적 타격이 있을지라도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꼭 하는 분”이라고 부연했다.

그가 보는 정 전 대표는 “민주주의와 의회주의의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국정을 이끌면 “중요한 결정을 할 때 혼자 독단적으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또 히딩크 감독이 ‘5대0’ 감독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을 때도 믿고 힘을 실어줬듯이 “계파정치를 멀리하고 능력 위주로 사람을 쓸 것”이라고 장담한다.
글로벌한 삶을 살아온 김씨는 또 남편이 “세계 어느 곳, 어떤 외교현장에서도 당당하고 유연하다”면서 “꼭 필요한 말만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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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 민주당 대표와 이윤영 여사.

이윤영(손학규 민주당 대표)
민심대장정의 동반자
“수배, 투옥도 시간이 지나고 나니 다 에피소드였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의 부인 이윤영 씨는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다. 4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난 이씨는 1·4 후퇴 때 월남한 뒤로 서울일신초등-서울사대부중-서울사대부고-이화여대 약대 등 줄곧 서울에서 공부했다. 대학 3학년 가을 어느 날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를 들렀다가 운명의 남자를 만났다.

두 사람은 곡절 많은 7년의 연애를 거쳐 1974년 결혼에 골인했다. 군사정권 시절 손 대표가 수배·도피·검거를 반복하면서 연애다운 연애는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 특히 손 대표가 수감됐을 때는 여자친구 자격으로 시어머니 되실 분과 미래의 남편을 숱하게 면회 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약대를 졸업한 이씨는 손 대표가 노동운동에 뛰어들자 약국을 열어 두 딸과 손 대표를 뒷바라지했다. 지금은 전업주부로 손 대표를 내조한다. 2006년 손 대표가 ‘100일 민심대장정’에 나설 때 이씨도 전국을 동행하며 말벗이자 아내로서 남편의 건강과 식사를 챙겨주는 등 내조형 동반자의 길을 걸었다.

1946년생인 이씨의 요즘은 인생을 한 발짝 떨어져서 차분하게 관조하는 시기인 듯도 했다. “남편의 학생운동·민주화운동과 수배·투옥으로 점철된 가정생활인 까닭에 남들에게는 어려운 시기로 보일 것”이라면서도 “시간이 지나고 보니 다 에피소드가 됐다”고 말했다.

배우자로서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질문에 “한 가정의 아내로서, 엄마로서 평범하게 살아왔다”고 돌이켰다. 그러면서 “가족과 함께 있을 때 편안하고 행복할 수 있는 게 남편에게 힘이 될 거라 생각하며 살았다”고 담담하게 소회를 밝혔다. 그가 아는 손 대표는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정치를 한다. 그래서 정치인 배우자로 산다는 게 특별할 것은 없고 “남편의 마음가짐을 안다는 점에서 첫째가는 지지자”라고 자신을 규정했다.

정치인 손학규가 어떤 사람이냐는 물음에는 한껏 자랑을 했다. “마음이 편안하고 늘 한결같은 사람이다. 정치를 할 때도 진심과 정성으로 할 사람이다.” 그래서 손 대표가 대통령으로서 국정을 이끈다면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신념으로 일할 것”으로 확신한다. 이씨는 또 자기 남편은 한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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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훈 서울시장과 송현옥 여사.

송현옥(오세훈 서울시장)
자기 일에 당당한 연극 전공 교수
“가장 하기 싫은 일(선거 유세)이 가장 보람된 일”

송현옥(50) 씨는 지난해 6월 서울시장선거 개표 결과를 보면서 손에 땀을 쥐었다. 밤이 이슥하도록 엎치락뒤치락했기 때문이다. 남편 오세훈 서울시장이 신승을 거뒀을 때 송씨는 약간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을 법하다. 그는 “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보니 선거 유세를 한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부담스럽고 내키지 않을 때가 더러 있었다”고 속내를 열어보였다.

송씨는 세종대 영화예술학과 교수(연기예술 전공)이자 연극연출가다. 남편은 시정(市政)을 통해, 그는 교단과 연극을 통해 세상에 자기 목소리를 드러낸다. 서로 표현하는 방식과 공간이 다르다 보니 선거운동이란 게 약간은 어색하다.

송씨는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추상조각의 선구자 송영수 작가다. 지난해 작고 40주년을 맞은 송영수 작가는 한국에서 미술교육을 받은 1세대 작가이자 교수다. 송씨의 모친은 수학자인 사공정숙 고려대 교수다. 두 오빠도 현직 교수다. 2남 2녀 중 장녀인 그는 홍익북초등·고려중·성신여고를 거쳐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이후 석사(미국 희곡)와 박사(영국 희곡)를 미국에서 하고, 예일대 드라마스쿨에서 연출법을 공부했다.

오 시장과는 오빠의 친구이자, 고교 그룹과외 동료며, 캠퍼스 커플이기도 했다. 송씨는 자기 일에 매우 당당하고 깊은 애착을 가졌다. 인생의 80%를 차지하는 게 자신의 일이고, 오 시장 부인으로서의 일은 20%가량이라고 말할 정도다. 그는 몸에 아직 익숙지 않은 선거운동을 통해 남편에 대한 서울시민의 사랑을 확인하고 충고를 귀담아듣는다. 그래서 “가장 하기 싫은 일(선거운동)이 가장 보람된 일이기도 하다”는 게 그의 경험담이다.

부인에게 오 시장은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한결같은 사람”이다. 남편·서울시장·정치인으로서 신뢰를 갖게 한다는 말이다. 남편에게서 부러운 게 하나 있다. 바로 ‘긍정적인 성격’이다. “인간에 대한 낙관적인 믿음과 희망은 내가 가장 닮고 싶어하는 덕목이다.”

그가 아는 오 시장은 단기적 평가에 연연해하는 사람이 아니다. “서울이 당면한 현실을 깊이 고민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정책을 수립해왔다”고 송씨는 강조한다. 지난 지방선거 때 오 시장이 예상 밖으로 고전한 것도 “사람들이 그걸 아직 낯설어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한다. “남편이 선택한 길은 우리나라에 미래지향적인 반석을 세우는 과정”이라고 그는 힘줘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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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수 경기지사와 설난영 여사.

설난영(김문수 경기지사)
지사 부인이 된 노조위원장
“지금의 삶이 과거 노동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어”

“청색 작업복을 입고 사무실에 나타난 그는 참으로 맑고 신선하고 똑똑해 보였고, 열정적으로 보였으며, 솔직해 보였고, 직선적이었다. 때론 순수한 아이 같은 느낌도….” 김문수 경기지사의 부인 설난영 씨가 김 지사를 처음 봤을 때 가졌던 단상이다. 그때가 1978년 8월께. 구로공단 세진전자 노조위원장이던 설씨와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이던 김 지사는 상급단체인 전국금속노동조합 남서울지역지부에서 처음 만났다. 설씨는 “그 이미지는 세월이 지난 지금도,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설병호 씨(84)와 이정원(1970년 별세) 씨 사이에 4남 3녀 중 장녀이자 셋째로 태어나 전남 순천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세진전자에 입사했다. 그리고 이 회사 노동조합위원장을 1978년부터 1982년 7월까지 지냈으며, 비슷한 시기 전국금속노동조합 남서울지역지부 여성부장을 겸임했다. 이때 김 지사는 지역지부의 청년부장으로 활동해 두 사람은 1주일에 한 번 이상 지부 회의 때마다 만날 수 있었다. 1년 남짓 지난 어느 날 김 지사가 찻집에서 설씨에게 청혼했다. 그때 설씨는 노동조합을 해야 하므로 독신으로 살겠다며 퇴짜를 놓았다. 그는 “김문수라는 사람을 결혼 대상으로 한 번도 생각해본 일이 없다”고 강수를 뒀다. 5공이 들어서고 수배당한 김 지사가 설씨 가족이 운영하던 마포의 제과점에 몸을 의탁한 뒤 두 사람은 백년가약을 맺었다.

김 지사가 입고 다니는 양복을 자세히 보면 오래됐거나 바지 무릎이 빛을 바랜 경우가 더러 있다. 부인이 옷을 잘 사지 않기 때문이다. 부부가 무척 검소하고 소탈한 편이다. 설씨는 노조 시절 탁아소를 운영해본 경험이 있다. 요즘도 틈나는 대로 복지시설을 찾는다. 이 밖에 설씨는 복지·여성·문화 분야에 관심이 많으며, 조용히 내조하는 스타일이다.

설씨에게 정치인의 아내란 “직함 없는 정치인”과 같다. 자신의 눈높이를 항상 위보다 아래에 둬야 하고, 귀를 열어 민심을 남편에게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설씨는 또 지금의 삶이 과거 노동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본다.
“현장에서 어려운 노조원을 대변한 것처럼, 지역민들의 어려움을 남편에게 정확하게 전달하고, 함께 아파하고, 해결해주는 협조자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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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과 민혜경 여사.

민혜경(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
패션 모델이 된 가정주부
“잘하기보다는 남편이 좋아하는 부분에 맞추려 애쓴다”

민혜경 씨는 2007년 대통령선거 결과에 누구보다 큰 충격을 받았을 법하다. 남편이 대선 후보로 나가 큰 표차로 떨어졌으니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조하는 입장에서 더 힘들었던 건 대선 당시 상대방 진영의 공격으로 가족들이 상처를 입는다는 사실이었다. 선거 당시 아들의 유학이 도마에 올랐다.

“사실 우리 아이는 열심히 공부해서 제 실력으로 장학금을 탔는데도 결과적으로 출마한 아버지에게 짐이 된 것을 괴로워했다”고 그는 말했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며 가슴 아파했다”고 후보 가족의 비애를 전했다.

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의 부인 민씨는 1956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전주교대 교수와 전북사대부고 교장을 역임했다. 민씨는 전주교대 부속초등학교-기전여중-전주여고를 거쳐 숙명여대 기악과를 졸업했다. 1981년 결혼한 그는 홀로된 시어머니를 24년간 모셨고, 시동생 셋도 장가보냈다. 한때 가계에 보탬이 되고자 전공을 살려 피아노학원을 열기도 했지만 본업은 주부였다. 직접 청국장을 띄워서 다양한 요리에 활용하고, 청국장 샌드위치도 만든다.

남편의 정치 입문과 대선 출마는 민씨 인생의 물줄기를 돌려놓았다. 민주당의 전신인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부인 모임에조차 참석하는 것을 꺼리던 그가 남편 대신 지구당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다. 문민정부 시절에는 청와대 의원부부 초청만찬에 제시간에 도착하기 위해 택배 오토바이도 얻어 탔다. 지난해 11월에는 서울무역전시장에서 열린 명품봉제컬렉션에 모델로 무대를 밟는 등 활동반경이 남편 못지않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요가를 취미로 삼는 그는 지금도 대외활동보다는 내조가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인의 배우자로서 크게 무엇을 잘하기보다는 남편이 좋아하는 부분에 되도록이면 맞추려고 애쓴다”고 말한다.
“남편이 들어오기 전에 집에 들어가 있으려 한다. 저라도 있어야 집에 온기가 있지 않겠나?”
민씨는 언제나 최종 선택은 남편의 몫으로 남겨뒀다. 그러나 딱 두 번 자기 의견을 고집한 적이 있다. 큰아이가 미국 유학 갈 때와 둘째가 해병대 자원했을 때 아이들의 손을 들어준 쪽은 민씨였다.

민씨는 정 최고위원이 “무슨 일이든 시작하면 끝까지 책임을 지는 사람”이라고 강조한다. 또 남북 문제에 관한 신념과 철학이 확고하며,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복지정책과 관련해 재원 확보 문제를 고민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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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균 민주당 최고위원과 최혜경 여사.

최혜경(정세균 민주당 최고위원)
전라도 청년 끌어안은 경상도 처녀
“역할 분담이 잘돼 부딪힐 일이 없다”

정세균 민주당 최고위원의 부인 최혜경 씨는 “남편이 집안일 걱정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스타일이다. 바쁘고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은 남편이 정치에 전념하도록 배려하는 게 그의 역할이라고 본다. 그 대신 가정과 자녀 문제에 관해서는 정 최고위원이 최씨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해준다. 바깥사람과 안사람의 역할 분담이 잘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래서인지 “의사 결정 때문에 크게 부딪힌 적이 없다”고 최씨는 귀띔했다.

평균적인 경상도 사람보다 더 무뚝뚝한 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최씨는 경북 포항에서 태어나 포항 흥해초등학교를 졸업한, 요즘 말로 ‘영포 라인’에 속한다. 1995년 타계한 선친 최홍준 씨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기도 했다. 서울 진명여고를 졸업한 그는 1973년 이화여대 영문과 3학년 재학 시절 미팅에서 정 최고위원과 만났다. 두 사람은 1978년 결혼해 1남 1녀를 뒀다. 예비 사위를 마음에 들어 한 친정어머니(김정화)가 중간에서 적극적으로 다리를 놓는 통에 결혼에 이르렀다.

쌍용종합무역상사에서 근무했던 남편이 미국 LA지사로 파견(1982~1990)되면서 가족이 모두 미국으로 건너갔다. 최씨는 아이들이 학교 다닐 즈음 매일 동네 도서관에 가서 책 읽는 습관을 길러주며, 아이들이 영어를 배울 기회를 가졌다는 사실에 뿌듯해했다.
반면 2009년 7월 민주당 대표로 있던 남편이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강행 처리에 반대해 단식할 때는 정치인의 부인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괴로울 수 없었다. 정 최고위원이 단식하는 동안 최씨도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배우자도 정치관이 있다. “헌신·희생·봉사의 DNA가 없는 사람은 좋은 정치인이 될 수 없다”고 최씨는 강조한다. 같은 맥락에서 “남편을 마음속에서부터 지지하지 않으면 좋은 배우자이자 동반자가 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가 소개하는 남편 정 최고위원은 “도덕적인 자기 관리와 겸손함이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남편의 캐릭터에 대해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믿음으로 보답하고, 남들이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것을 견디지 못할 정도로 신뢰를 중시 여긴다”고 최씨는 설명했다.

정 최고위원이 국정을 이끈다면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통합과 신뢰의 정치를 펼치리라 믿는다. “정 최고위원 본인이 어려운 생활을 겪어서인지 약자에 대한 배려심이 체질화돼 있다”고 신랑을 한껏 치켜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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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오 특임장관과 추영례 여사.

추영례(이재오 특임장관)
40년 가계 책임져온 억척 아줌마
“남편과는 당당하게 동지라고 생각하며 살아”

오늘날 이재오 특임장관이 있기까지 그 공의 절반은 부인 추영례(62) 씨의 몫이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5번에 걸쳐 근 10년간 옥살이를 한 이 장관은 “그때마다 좌절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아내 때문”이라고 말한다. 물론 신념과 정당성이 그를 지탱해준 힘이 됐지만 “아내의 사랑과 배려가 없었다면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렸을지도 모른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이 장관과 추씨의 만남은 눈물과 불안의 연속이었다. 양가 부모가 다리를 놓아 1971년 결혼했지만 결혼식 당일도 이 장관(민주수호청년협의회 회장)은 쫓기는 몸이었다. 신혼여행지 경주에서 첫날밤을 지내기 무섭게 남편은 경찰을 피해 줄행랑을 놓았다. 이후로 추씨는 집안일을 도맡았다. 바느질 솜씨가 뛰어나 옷가게를 열어 친정부모님을 포함한 세 자녀를 돌봤다. 지금 사는 23평형 한옥집도 이 장관이 감옥에 있을 때 추씨가 장만할 정도로 억척 여성이다.

신혼살림을 차린 서울 은평구에서만 40년을 살다 보니 지역에서도 추씨를 모르는 이가 없다.
추씨는 이 장관이 시대 상황에 굉장히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뒷바라지하는 동안에도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고 돌이켰다. 남편과는 당당하게 동지라고 생각하며 살았다고 한다.

가장 이재오는 어떤 사람일까? 정도, 눈물도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 추씨는 “남편은 눈물이 많은 편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 강한 듯하지만 아주 슬픈 영화를 보면 울기도 하고, 과묵한 것 같으면서도 약한 구석이 많다”고 표현했다. 친정아버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고마울 따름이다. 17년 동안 치매로 고생했던 친정아버지가 98세에 타계할 때까지 사위인 이 장관과 추씨가 줄곧 모셨다.
“이 장관은 아버지에게도 정말 잔소리 한번 안 했다. 아버지를 항상 번쩍 안아다 방에 모셔드리곤 했다. 정 많고 연약한 사람이 바로 제 남편이다.”

추씨는 요즘 남편이 마음을 아래로 가져가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이는지 흐뭇해한다. 그는 인생 60을 훌쩍 넘긴 나이라면 세상의 지혜와 사랑이 묻어나는 따뜻한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요즘 마음을 내려놓는 것을 보면서 기쁘기 그지없다. 경상도 성격의 고집스러움도 조금씩 줄어들고 있고, 요즘은 내 말도 많이 참고해주고 있어 고맙게 생각한다.”
추씨의 남편에 대한 마지막 바람도 이 장관이 “더욱 편안하고 따뜻하고 푸근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김지선(노회찬 전 진보신당 대표)
만학에 나선 인천 여성 노동자들의 큰언니
“같은 길을 함께 간다는 자부심으로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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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전 진보신당 대표와 김지선 여사.

노회찬 전 진보신당 대표의 부인 김지선 씨는 정치인의 배우자가 아닌 여성노동운동가, 사회운동가의 족적만으로도 주어진 지면을 채우고도 남는다. 부모 고향은 북한 황해도지만 김씨는 대청도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자랐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었고 2남 4녀 중 넷째이자 셋째딸로 자랐다. 인천송현초등학교를 졸업했으며 비인가 중학교 과정을 마친 16세에 신분을 숨기고 인천의 대성목재에 들어갔다. 어린 나이 때문에 취직을 못 하자 20살이던 언니 신분증을 내밀었다. 대학을 나온 한 노동운동가가 노동운동을 하던 김씨에게 “노동자가 된 계기가 뭐냐”고 묻자 “먹고살기 힘들어서”라고 짧게 답했다고 한다.

이처럼 김씨는 생존을 위해 노동자가 됐고, 노동자의 권익을 찾고자 노동운동을 했다. 그는 1978년 CBS생방송 현장에서 구호를 외치다 구속되기도 하고, 1983년 ‘인천블랙리스트 사건’으로 또 수감됐다. 이후 인천해고노동자협의회 사무국장, 인천여성노동자회 회장 등을 지낸 뒤로는 ‘인천 노동자들의 누나’라는 애칭이 따라다녔다.

노 전 대표에게 두 번의 프러포즈를 받은 끝에 1988년 결혼했다. 이때 김씨 나이가 36세, 노 전 대표 나이는 34세였다. 늦은 결혼인 데다 수배 중이던 남편이 결혼 10개월 만에 붙잡혔고 2년 넘게 옥살이를 했다. 때를 놓친 탓인지 슬하에 아직 자녀가 없다. 지금은 가정폭력피해여성 지원을 위한 상담활동을 하고 있으며, 풀뿌리 여성운동을 장려하는 모임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김씨는 만학도다. 중·고등학교 검정고시를 거쳐 2004년 방송대 법학과에 입학, 2008년 졸업했다. 2009년에는 사회복지를 복수전공했으며,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 시험에 합격했다.

김씨는 노 전 대표와는 같은 길을 함께 간다는 자부심으로 살아왔다고 밝혔다. “넉넉지 않은 생활이었지만 큰 불만은 없었다. 사회 변화를 도모하는 활동을 하면서 내 자신도 함께 성장해가는 데 초점을 뒀고 많은 것을 얻었다.”

정치인 배우자로 비쳐지기보다는 “인간 김지선의 모습으로 살고 싶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정치를 하는 노 전 대표에 대해서는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정치적 신념이 강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약자에 관심과 애정이 많다”고 평가했다. 김씨는 노 전 대표가 국정을 이끌면 다른 정치인보다 ‘균형감각’과 ‘문화적 코드’에서 특별히 더 잘할 것 같다고 예상했다.

박성현 기자 ps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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