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대통령에게 건의합니다.” … 무명 장인의 유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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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평생을 건칠(乾漆)이란 전통공예에 바친 무명 장인이 있었다. 고 정창호(1948~2010)씨다.

건칠은 삼베에 옻칠을 바르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해 조형물을 만드는, 공은 들되 돈은 안 되는 칠기공예다. 지난해 정씨는 비닐하우스 작업장을 화마로 잃고, 폐암 말기 진단까지 받았다. 이 같은 사연은 ‘화마 병마 가난도 누르지 못한다, 건칠 마지막 장인의 집념’(본지 2010년 10월 13일자 39면)에 소개됐다. 재기 의욕을 보이던 그가 결국 지난해 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뒤늦게 날아들었다. 고인이 대통령 앞으로 쓴 A4 3장짜리 유서와 함께였다.

 ‘존경하는 대통령님. 세상을 떠나며 그동안 제가 뼈저리게 겪었던 내용을 건의하오니 꼭 시정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의 건의 사항은 세 가지였다. 첫째, 여러 장인에게 기회를 달라는 것이다. 건칠은 중요무형문화재는 물론 시·도무형문화재로도 지정되지 않았다. 반면 여러 명이 보유자로 지정된 인기 분야도 있다. 어떤 장인들은 문화재·명장 등의 타이틀을 동시에 거머쥐고 중복 지원을 받는다. 그는 이런 혜택을 분산시켜 여러 장인에게 기회를 달라고 탄원했다.

 둘째, 가짜 장인을 색출해달라는 것이다. 고인은 자신의 작품을 공모전에 출품해 상을 받고 정부 지원을 받은 이들도 있다며 개탄했다. 마지막으로 평생 한 분야에 종사해온 수많은 무명 장인에 대한 대책을 세워달라고 적었다.

 ‘오죽 못났으면 한 분야에서 평생토록 살아왔겠습니까마는 그래도 그들이 민족의 문화유산을 전승시키는 애국자들이라고 봅니다.’

 문화재청은 최근 ‘중요무형문화재 지정(보유자 인정)에 관한 운영 규정’을 신설했다. 그동안 평가자의 주관에 따라 결정된다며 투명성 시비가 일었던 것을 20여 개 평가 항목을 만들고 실기능력을 검증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 규정 역시 기존에 지정된 종목 위주다. 새로운 종목의 지정은 ‘문화재청장 직권’에 의한다. 또한 소급 적용이 되지 않아 기존의 무형문화재 보유자들은 종신토록 검증 대상이 아니란 점도 아쉽다. 무명 장인의 죽음이 헛되지 않으려면 그늘진 곳까지 두루 살피는 정책이 필요하겠다.

이경희 문화부문 기자